두 大門의 두 갈래 길[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2024. 7. 1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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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돈의문의 엇갈린 운명
철거될 뻔했던 숭례문, 경성 금융가의 랜드마크로
500년 돈의문, 일제 근대화 명분 도로 확장에 헐려
4대문이었던 숭례문(남대문)과 돈의문(서대문)은 일제강점기에 운명이 엇갈렸다. 1920년대 중반 금융가 랜드마크가 된 숭례문 일대. 일제강점기 엽서에 실린 사진으로, 왼쪽에 1921년 신설한 파출소가, 오른쪽에 이설한 전차선로가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1915년 봄 ‘매일신보’에 실린 ‘여(余=나)는 경성 서대문이올시다’라는 기사의 말미는 이렇다. “돌이켜 다시 도량 넓게 생각하여보면 내 몸이 헐려나가는 것이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이전에 사람의 지혜가 열리지 못하였을 때야말로 이런 성문이 능히 도읍의 간성이 되었지만은 세상 매사가 모두 진보 발달되어 지난번 우리 문 아래로 지나가는 양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즉 덕국(독일)의 대포 한방이면 남산이라도 무너진다 하니 나 같은 놈은 골백이 있어서야 조금도 쓸데가 없고 도리어 전과 달라 번화한 경성의 교통에만 방해가 될 뿐이오 더구나 도로 개정으로 인하여 헐린다 하고 내 몸뚱이 되었던 석재는 다시 여러분의 밟고 다니실 길로 들어간다 하니 죽어도 아주 죽는 것이 아니오 공번된 큰일을 위하여 몸을 버리는 것이니 서대문의 면목으로 어찌 기껍지 아니하오리까?”(매일신보·1915. 3. 4.)

여기에서 화자는 물론 서대문, 즉 돈의문(敦義門)이다. 돈의문이 “도로 개정으로” 곧 헐리게 된 모양이다. 이와 관련한 도로는 1914년 7월 정비를 시작한 ‘서대문통’이다. 경희궁 앞에서 출발하여 돈의문(현재 강북삼성병원 입구)을 빠져나가 의주대로와의 교차점(현재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사거리)에 이르는 서대문통은 경성 도심부와 외곽의 전통적인 간선 교통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이다. (현재 새문안로) 총독부는 서대문통의 폭을 넓히고 직선화하면서 단선인 전차선로도 복선화하고자 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은 돈의문의 존재였다. 대한제국기 단선으로 처음 부설한 전차선로는 돈의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를 복선화하면 문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측량 작업을 마친 총독부는 “길을 넓히게 되”어 “그 문을 부득이 헐어버리”기로 결정했다. 도로 공사의 진전에 따라 철거할 돈의문의 처분도 결정되었다. 기와와 목재는 경매에 부치며 석재는 도로 공사에 사용하기로 했다. 기록에 따르면 목재 일체는 205원에 개인에게 낙찰되었다. 그리고 석재는 “다시 여러분의 밟고 다니실 길로 들어”갔던 것이다. 단 “고고학상에 참고할 자료 될 부속물은 총독부에서 영구히 보존한다”고 했다.(매일신보·1915. 3. 7.) 당시 얼마나 보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는 돈의문 현판(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이 유일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돈의문이 철거되기 전인 1914년 서대문통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돈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 도성의 서문으로 건립되었다. 처음 위치는 사직동 부근으로 현재 위치보다 북쪽이었다. 그래서 태종대에 문을 열어 두는 것이 경복궁의 지맥을 해친다고 하여 폐문되었다가, 세종 4년(1422년) 도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돈의문도 남쪽에 새롭게 설치했다. 새롭게 설치했다고 하여 이때부터 신문(新門) 혹은 새문이라고 불렸다. 이렇듯 수백 년 도성의 성문이었다는 위상을 모른 척할 수는 없어서인지 총독부는 철거 결정을 하면서 나름대로 여론의 동향도 살핀 것 같다. 1914년 말 서대문경찰서장이 올린 보고서는 “서대문의 존치를 바라는 선인(鮮人)의 여론도 없지 않다”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나 같은 놈은 골백이 있어서야 조금도 쓸데가 없고 도리어 전과 달라 번화한 경성의 교통에만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경성 시구개정의 도시 근대화 논리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도시 근대화를 명분으로 사라진 돈의문과 정반대로 살아남은 것이 숭례문이다. 사실 숭례문은 더 일찍 철거 논의가 있었다. 러일전쟁기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숭례문이 포차(砲車) 왕래에 지장을 준다고 하여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 버려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시의 서슬 퍼런 주둔군 사령관을 설득하여 철거될 뻔한 숭례문을 구한 것은 당시 경성의 일본인 거류민단 민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일본에서 요미우리신문 주필을 지낸 언론인으로 조선에 건너와 일본어 신문인 한성신보사 사장을 지냄)였다. 나카이는 숭례문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한양에 입성할 때 통과한 문이라고 하며 임진왜란 당시의 건축은 숭례문을 포함하여 두세 가지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지 않냐고 하세가와를 설득했다고 한다.(中井喜太郞 ‘朝鮮回顧錄’·1915)

돈의문 철거 이후인 1930년 서대문통. 총독부는 경성 도로 정비의 성과를 과시하려 철거 전후의 사진을 대비시켜 널리 알리려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물론 나카이의 주장은 그의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숭례문은 철거되지 않았다. 1907년 일본 황태자(후일 다이쇼[大正] 천황)의 방한을 맞아 통감부가 기차역에서 도심부로 들어오는 길을 넓히는 과정에서도 숭례문은 그대로 두고 좌우의 성곽을 철거했다. 성문을 통과하던 단선 전차선로를 복선화할 때도 돈의문과 달리 문 옆으로 선로를 이설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후 나카이의 주장은 하나의 통설로 굳어진 듯하다. 예컨대 1927년 발간된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이라는 여행안내서는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에서 경성에 쳐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남대문이 이 남대문이다”라고 썼다. 또 경성에서 오랫동안 교원 생활을 하면서 일종의 ‘향토사가’로 활동한 오카다 미쓰구(岡田貢)도 자신의 저서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소개했다.(‘京城史話’·1936) 나카이 주장의 정확한 진위는 물론 알 수 없다. 자신의 업적(?)을 과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회고는 일본인들이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계속 재생산된 것이 아닐까? 일제강점기 숭례문은 자연스럽게 ‘왜장의 한양 입성’을 상징하는 ‘역사 기념물’이 되어갔다.

1921년 숭례문 옆에는 파출소가 신설되었다. 이 파출소를 짓는 데는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많은 1만 원의 건축비를 들였다고 한다. 그 비용은 여러 은행에서 기부한 돈으로 충당했다. 건물을 준공하면서 남대문소학교(현재 숭례문 옆 대한상공회의소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학교)를 빌려서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파출소 낙성식까지 열었다. 여러모로 이례적이다. 조선어 언론은 이 파출소 신설은 “경성의 대소은행이 남대문통에 모여 있으므로 여러 은행의 이문(里門) 같은 남대문을 잘 지켜 달라는 의미”처럼 보인다고 했다. 나아가 3·1운동 이후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새롭게 총독으로 부임하여 “잘한 일을 일일이 셀 수 없도록 많은 모양이라 하나 그중에 경찰 확장이 제일 유명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로” 경찰 확장이 “필경 동양 제일의 파출소까지 산출”했으니 “어느 의미로 보면 이 굉장한 파출소는 또한 ‘재등기념탑’”이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동아일보·1921. 7. 21.)

기사의 본의는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 일환으로 보통경찰제도를 실시하면서 대대적으로 경찰을 증원한 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문’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이문은 조선 초기 동네의 경계를 표시하고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그 어귀에 세운 문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이문 중에는 관아 시설이나 왕실 관련 고위층 주거지 등을 보호하는 표지 역할을 하는 것도 있었다. 이런 경우 ‘이문의 안쪽’은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특수 구역의 이미지가 있었다. “여러 은행의 이문 같은 남대문”에서 숭례문이 이제 경성 식민지 금융가의 랜드마크가 된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도시 근대화 바람 속에 사라진 돈의문과 식민지 수도의 역사 기념물이자 랜드마크가 된 숭례문, 일제 식민지배라는 엄연한 시대적 조건을 빼놓고 그 엇갈린 운명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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