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매뉴얼 없는 세상 … 우리아이 날개 달아줄 '국·토·인·생'
◆ 매경 명예기자 리포트 ◆
한국 사회가 거둔 '압축 성장'은 '돌진적 근대화'의 성공 사례다. 그런데 최근에는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한 '압축 소멸'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인구수 급감에 따라 학령인구 수도 급감하고 있다. 이제 일등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이 더욱 절실해졌다. 배우는 속도가 빠르건 늦건, 어떤 개성을 지니고 있건, 모든 학생이 잠재 역량을 최대한 계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구가 줄어든 미래에도, 한국이 산업과 학문, 문화에서 선진국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압축 소멸'을 피하는 길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는 맞춤형 교육에 달려 있다.
압축 성장은 선진국 사례를 매뉴얼 삼아 한 방향으로 돌진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제는 매뉴얼이 없다. 반도체, 정보통신, 문화 산업 등 여러 영역에서 한국은 더 이상 추격자가 아니다. 선도자가 된 지금은, 어느 방향으로 달려가야 할지를 우리가 정해야 한다. 이는 인구 감소만큼이나 낯선 변화다.
정치와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독재에 맞서 싸우던 시대엔, 이미 민주주의를 실현한 선진국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엔 치열한 투쟁이 곧 정의였다. 국가가 개인을 억누르던 시절이므로, 권리는 무조건 옹호해야 했다.
민주화가 이뤄진 지금은 다르다. 상대를 악마로 모는 투쟁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할 때가 많다. 극단적인 권리 추구가 종종 공동체를 망가뜨린다. 우리 편이 꼭 천사는 아니며, 상대방이 꼭 악마도 아니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미래의 시민이 살아갈 세상은 매뉴얼이 없는 불확실한 세계일 것이다. 나는 교사와 학부모 연수를 할 때면, 이렇게 묻곤 한다. "현재 우리 사회와 지구촌에 제기되는 '미래 도전'을 꼽아보세요. 그 가운데 무엇이 중요할까요?"
나는 네 가지로 압축해 본다. 첫 번째 도전은 지구촌화의 불안이다.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과 중국의 세계 무역 체제 편입 이후,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묶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와 반대로 흐르는 물결이 거세다. 관세 장벽이 높아지고 무역 갈등이 격렬해졌다. 중국이 패권 국가로 떠올랐고, 세계 곳곳에선 새로운 분쟁이 벌어진다. 이와는 별도로, 교육은 탈(脫)국경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여기에도 주목해야 한다.
두 번째 도전은 양극화와 진영 갈등이다. 한국은 압축 성장에 성공했으나, 동시에 사회경제적 양극화도 심각해졌다. 이에 더해 정치적 진영 갈등 역시 고조되고 있다. 압축 성장 시대에 자란 어른 세대는 타협에 서툴다. 주어진 목표를 향해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만 놓고 경쟁하는 문화에 익숙한 탓이다. 문화와 교육 수준이 전보다 높아졌음에도, 정치와 사회 여러 분야에서 진영 갈등이 깊어진 한 이유다.
세 번째 도전은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신기술의 위협이다. 학부모들을 만날 때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 아이들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글쓰기, 디자인, 작곡, 코딩 등 인간의 정신활동 가운데 일부를 인공지능이 대체한다면, 일자리가 줄어들거나 지금 인기 있는 직업의 위상이 바뀔 수 있다는 불안이 녹아 있다.
네 번째 도전은 기후 위기로 대표되는 글로벌 생태 위기다. 이는 근대 산업문명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2년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에서 "공업 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을 이야기했다. '압축 성장'의 시동을 걸던 시기엔, 분명히 많은 이의 가슴을 뛰게 하는 발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공장 굴뚝의 검은 연기를 보며 감동하는 사람은 없다. 기후 변화로 대표되는 생태 위기를 누구나 일상에서 실감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네 가지 도전에 응전하여, 우리 아이들을 어떤 미래 인간형으로 길러야 할 것인가. 지난 십수년 동안 교육개혁의 화두는 민주시민교육이었다. 우리 학생들의 미래상은 '민주시민'으로 상정됐다. 그러나 민주시민교육 역시 새로 거듭날 때가 됐다. 부당한 권위에 맞서 권리를 옹호하는 것만으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시민의 소양을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지구촌화에 대응하여 '세계시민형' 민주시민, 양극화와 극단적인 진영 갈등에 대응하여 '공존'형 민주시민, AI디지털 기술혁명에 대응하여 AI기술 역량을 갖는 민주시민, 그리고 기후위기에 대응하여 생태시민형 민주시민 등을 상정했다. 그러자면 추가적인 교육방법론이 개발돼야 한다. 실제로 선생님들이 교실에서 다양한 교육방법론을 시도하고 있다. 나는 국(국제공동수업)·토(역지사지형 토론수업)·인(인공지능)·생(생태전환) 교육으로 축약하여 강조한다.
첫째, 지구촌 정세가 불안정할수록 우리 학생들은 세계시민으로 자라야 한다. 낡은 국수주의는 패권 갈등을 부추기고, 지구촌을 갈라놓는다. 따라서 우리 학생들은 국경을 넘는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 문화와 피부색이 다른 지구촌 이웃 앞에서 주눅 들지도 않아야 하며, 편견에 사로잡혀 상대를 무시하지도 않아야 한다. 낡은 국수주의를 넘어선 세계시민을 기르는 교육은, 민주시민교육이 국경을 넘어 확장하는 과정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이를 '세계시민형 민주시민교육'이라고 부른다.
이를 위해 서울 학생들은 국제공동수업을 하고 있다. 외국 학생과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만나 공동의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수업이다. 세계시민교육은 그저 구호로 이룰 수 없다. 외국 학생과 토론하는 기회가 늘어나야 한다. 이는 새로운 시대 공교육의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한다.
둘째, 양극화와 극단적 진영 갈등은 공동체를 망가뜨린다. 상대의 입장에 공감하기보다, 무작정 혐오와 적대의 정서를 쏟아내기만 하는 경향이 강화된다. 사회가 쪼개지고 무너지면, 우리 학생들의 미래 역시 어두워진다. 이 같은 위협에 맞서는 역량은, 토론으로 기를 수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을 시도하고 있다. 평소 지지하던 것과는 다른 입장에 서서, 즉 역지사지(易地思之)하여 토론을 하게끔 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다른 입장을 지닌 상대와 내 입장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찾는 법을 익힌다.
이와 함께 나는 네이버나 구글 등 플랫폼 기업들에 알고리즘 개선을 요구하고 싶다. 한 번 검색을 하면 '선호(preference)' 기반 정보를 계속 제공하고, 이는 학생들의 편견과 확증 편향을 강화한다. 온라인 공간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이 균형 있는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에 정보기술 기업들이 동참하기를 소망한다.
인공지능 혁명 시대가 그려 낼 미래상에는 확실한 정답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초중등교육과정은 한편으론 우리 학생들이 미래 직업인으로 살아갈 역량을 기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과거의 아날로그형 직업역량을 뛰어넘어 인공지능·디지털 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직업역량을 갖춰야 한다. 일반 교육 과정에선 신기술의 이해를 위한 기초 소양을 갖추는 AI이해교육, 산업의 디지털 전환과정에서 인공지능을 융합적으로 활용하는 AI활용교육, 더 나아가 인공지능 관련 기술 개발의 기초 역량을 기르는 AI개발교육 등으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다.
인공지능 혁명 시대엔 아날로그형 페다고지(pedagogy·교육학)를 AI형 페다고지로 전환해야 한다. 교육부가 추진하는 AI 디지털 교과서, 11개 시도교육청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교수학습 통합 플랫폼, 서울시교육청이 역점을 두는 스마트기기 휴대학습 '디벗'과 전자칠판이 결합하여, AI형 페다고지를 구현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물론, 하드웨어만으론 안 된다. AI형 페다고지의 본령은, 모든 학생이 저마다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고,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개별화 맞춤형 교육에 있다.
아울러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입체적인 안목도 중요하다. 신기술에 무조건 열광하는 태도, 기술 변화에 아예 눈을 감는 태도 모두 잘못이다.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낡은 관행 탓에, 한국에선 과학기술을 사회적 맥락에서 살피는 문화가 자리 잡기 어려웠다. 인공지능의 기초 개념은 공학자들이 창안했으나, 그 활용 방식은 사회적으로 정해진다. 또 인공지능 알고리즘에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통념이 반영돼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AI리터러시(문해력), 디지털 및 AI 윤리 등에 대한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 학생들은 압축 성장 시대에 익숙했던 관행과 문화에서 벗어난 생태 시민으로 자라야 한다. 인류가 멸종 위기를 피하기 위한 노력에 미래 시민으로 자랄 학생들도 동참해야 한다. 서울시교육청은 '손수건에서 태양광까지'라는 슬로건으로 생태친화적 교육과정 운영, 자전거 교육 등 생태 스포츠 활동, 환경과 보건을 위협하는 식재료 금지까지 포괄하는 '먹거리 생태전환교육', 신설 학교 건립에서의 탄소배출 최소화 등 다양한 차원에서 노력하고 있다.
교육은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전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 학생들이 불확실한 세상이 던지는 새로운 도전에 응전하는 힘을 어떻게 기를지, 그리하여 어떤 모습의 미래 시민으로 자랄지는 교육의 본질과 닿아 있는 질문이다. 서울시교육청의 '국·토·인·생' 교육은 그 답을 찾는 작은 시도가 되리라 생각한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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