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격노가 사건의 본질이다 [성한용 칼럼]
성한용 선임기자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9일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두번째다. 국회에서 정부로 법안을 이송한 지 나흘 만이다. 경찰이 임성근 사단장을 무혐의 처분한 지 하루 만이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국무회의에서 거부권 행사를 건의한 직후다.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에게 이런 문자가 전달됐다.
“알려드립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오늘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순직 해병 특검법 재의요구안’을 재가했습니다. 어제 발표된 경찰 수사 결과로, 실체적 진실과 책임소재가 밝혀진 상황에서 야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순직 해병 특검법은 이제 철회되어야 합니다. 또한, 나라의 부름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다 사망한 해병의 안타까운 순직을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악용하는 일도 더 이상 없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순직 해병의 명복을 빌며, 유족에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대변인실.”
이게 무슨 소린가? 경찰 수사로 실체적 진실과 책임소재가 밝혀졌다고? 대한민국에서 언제부터 경찰 수사 결과와 대법원 판결이 동격이 됐나?
아무리 다급해도 그렇지 경찰 수사 결과를 근거로 특검법을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은 궤변에 불과하다. 명의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문자를 보낸 사람도 좀 부끄러웠던 것 같다.
채 상병 사건의 본질은 임성근 사단장 과실치사가 아니다. 해병대 수사단이 장관의 결재를 받아 경찰에 넘긴 자료를 누구의 지시로, 왜 되찾아왔고 임성근 사단장을 제외한 뒤 다시 넘겼는지가 사건의 본질이다. 과실치사 사건이 아니라 직권남용 사건이다.
만약 윤석열 대통령의 격노와 지시에 의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윤석열 대통령의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 형법 123조(직권남용)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이다.
만약 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을 오스트레일리아 대사로 임명한 것이라면 직권남용과 별개로 또 다른 범죄가 성립할 수 있다.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 사건 초기로 돌아가보자. 애초에 해병대 수사단이 경찰에 넘긴 자료에 의해 경찰 수사가 진행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경찰이 임성근 사단장을 무혐의 처분했다고 해도 그건 경찰의 권한이다. 경찰이 과실치사 혐의를 인정하고 검찰이 기소한 뒤 재판에서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려도 마찬가지다. 그건 법원의 권한이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윤석열 대통령의 격노와 지시에 의해 임성근 사단장이 혐의자에서 제외된 것이라면 “윤석열 대통령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강한 의문이 남는다. 김건희 여사가 민원을 받은 흔적이 드러나고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아는 게 병이다”라는 속담이다. 한자어로는 ‘식자우환’이다. ‘지식의 저주’, ‘전문가의 저주’도 비슷한 개념이다.
운전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바로 그 자신감 때문에 대형 교통사고를 낼 위험이 크다는 가설이 있다. 로드킬 당하는 동물 가운데 고양이가 많은 이유는 자신의 속도를 과신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평생 검사만 했던 사람이다.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을 했다. 어떤 혐의에 어떤 법률을 적용해서 처벌할 수 있는지 자신이 최고의 전문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자신이 박근혜 대통령의 문화체육부 인사 개입에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고,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냈다는 사실을 깜박 잊은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이 설명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어차피 특검은 해야 한다. 국회 재의결을 피해 갈 수는 있어도, 분노한 민심을 피해 갈 수는 없다.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야당과 타협이 가능하다. 이재명 대표와 직접 만나도 좋고, 여야 원내대표들에게 맡겨도 좋다. 이태원 특별법처럼 해야 한다.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제안한 ‘대법원장 등 제3자가 추천하는 특검’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바로 윤석열 대통령이 사는 길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결단을 촉구한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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