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암투와 바지사장 [유레카]
#조선의 19대 임금 숙종의 장희빈(장옥정)에 대한 사랑은 피비린내 나는 사랑이었다. 장희빈이 아들(경종)을 낳자 계비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고 궁녀 출신 장옥정을 왕비로 삼았는데, 반대하는 신하들에겐 유배와 사약은 기본이고, 압슬(壓膝)과 능장(稜杖)으로 고문도 했다. 압슬이란 사람을 꿇어앉히고 무릎에 돌이나 널빤지를 얹어 짓이기는 것이고, 능장이란 쇳조각이 달린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다.
#중국 진나라의 이세황제(호해)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시황제의 18번째 아들이었는데, 시황제가 지방 순행 중 사망하자 시황제의 환관이었던 조고와 승상 이사가 짜고 유서를 조작해 시황제의 장남 부소를 자결하게 하고 대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요즘 말로 바지사장이었다. 당연히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조고는 신하들이 자신과 황제 중 누구 말을 따르는지 시험하려고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했고(지록위마), 사슴을 사슴이라고 말한 황제를 따라 곧이곧대로 말한 신하들은 나중에 죽임을 당했다. 호해 자신도 승상 이사에 이어 조고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진나라는 통일 15년 만에 멸망했다.
#김건희 여사가 정가의 핵심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른바 ‘문자 읽씹’ 논쟁으로 당무 개입 논란을 일으킨 데 이어, 해병대 채 상병 사망 관련 임성근 사단장 구명 로비에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의 공범이 간여한 것으로 보이는 녹취록이 공개됐다. 이쯤 되면 ‘만사처통’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김 여사의 문자를 무시했다며 “이런 ××인데, 어떻게 믿냐”고 격노했다고 한다. 아내에 대한 사랑 앞에서 권력 창출 동지와의 오랜 우정은 깃털처럼 가볍다. 조선시대였다면 압슬과 능장 형을 가했을지도 모른다.
#윤 대통령이 브이원(V1)이라면 김 여사는 브이제로(V0)라는 세간의 소문이 조금씩 확인되고 있다. 윤 대통령이 호해와 비견할 만한 바지사장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은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이라는 비선 권력이 저질렀는데, 지금은 최순실과 문고리 권력을 합친 것보다도 강력한 ‘비선 실세’가 대통령실 내부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치 왕조시대 구중궁궐의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보는 것 같은 생경함이 국민을 놀라게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공사 구분을 못했던 조선의 숙종인가, 진나라의 ‘바지사장’ 호해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이재성 논설위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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