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하는 대학 공공성 투쟁

배성인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성공회대분회장 2024. 7. 1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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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육 공공성 강화해야 한다] ⑧ 대학 내 차별 철폐가 그 시작이다

한국 사회 모순을 집약해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 대학이다. 현재 대학의 문제는 학술정책, 교원정책, 학문체계, 교과과정, 비정규노동 등 구조적이고 총체적이다. 대학의 시장화와 학문의 상품화가 진즉 전면화되어 이제는 그 누구도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대학의 3주체인 교수-학생-직원의 관계는 때로는 협력적이지만, 때로는 적대적이면서 비협력에 기초한 권력관계이다. 꼰대만 있고 선생과 스승은 없는 경쟁과 배제의 공간이다.

대학은 학벌주의의 온상이다.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가 근절되지 않은 근본적 이유는 대학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학벌주의가 사라질 줄 알았다.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 학벌주의는 대학서열체제에 의해 재생산되는 구조이며, 이는 대를 이어 세습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 결과 대학교육은 양적으로 팽창되었지만 계급불평등구조는 더욱 심화되었다. 엘리트주의와 전문가주의는 보너스다. 대학 내 불평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는 최대 10배가 넘는다. 비정규직에게는 노동권 보장이 안 되며, 노동할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대학은 봉건적, 권위주의적, 수직적, 위계적… 공간이다. 그중에 으뜸은 차별이다. 강의하려고 학교에 가면 화장실 세면대가 너무 깨끗해서 손 씻기 아까울 정도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미끄럼 방지 금속은 밟아서 더러워질까 걱정이다. 그냥 마음이 밝아지고 상쾌하다. 늘 청소 노동자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항상 강의실에 들어갈 때 긴장을 늦추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 고민하지만 준비된 멘트를 구사해서 효과를 거둔 적은 별로 없다. 많은 학생들이 이미 인문학적 사유와 사회과학적 세계관 안에서 살고 있다. 그들이 나의 부족함을 채워준다. 학생들 덕분에 열심히 살고 잘 버티고 있다. 깊이 감사한다.

비정규교수에게도 가끔 대학원생이 지도교수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온다. 당연함에도 주저하면서 어색하게 받아들인다. 정규직 교수들에게 질투와 비난을 온몸으로 받을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팀을 만들어 세미나를 지도하고 학습도 한다. 학술대회나 토론회에서의 이들의 실무는 대단히 막중하다. 본인이 알아서 학술행사에 참석해서 분위기도 익히고 역량을 스스로 키우기도 한다. 이들과의 만남이 큰 축복이다.

이들 모두는 대학에서 주변인이자 경계인이다. 벌거벗은 생명이자 몫 없는 자들이다. 학교측에서 공식적으로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한 차별은 일상이다. 청소 노동자를 비롯한 시설, 경비, 주차관리 등의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은 일상이다. 직접고용은 그저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하다. 대학의 핵심 주체인 학생들이 대상화된 지도 옛날이야기다. 자본의 노예가 된 대학에서 학생들의 졸업장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벌주의는 점점 우리의 숨통을 더 세게 조여 오면서 이 사회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스펙조차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대학과 자본의 전략을 이제는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대학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두 번 죽이는 공간이 된 것이다.

대학원생은 학술단체 행사에 가장 많이 동원되는 대상이다. 이들이 실무를 담당하지 않으면 학술행사는 불가능하다. 전임교수의 연구에 동원되는 장면도 흔한 광경이다. 대학원생은 교수의 연구에 동원되어야 하는 인력이 아니다. 이들은 교육의 주체이면서 대상이며 미래의 동료가 될 연구자다. 학벌 때문에 대학원생들의 서구 유학이나 외국박사를 원한다면 차라리 국내 대학원을 폐기해라.

대학의 주체 중에서 비정규교수만큼 미묘하고 복잡한 서사를 가진 주체는 없다. 집요한 배제와 고립의 시간을 거쳐 대학의 주체에서 사라졌다. 비정규교수가 대학 붕괴의 척도가 되었지만 이를 인식하는 대학도 없다. 지금이야 비정규직이 일반화되었지만 비정규교수들의 불안정한 삶은 비정규노동의 원조격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을 감싸고 있는 고학력과 학벌주의가 이들 문제를 고립무원과 무관심으로 만들었다.

대학 공공성을 다시 생각한다

대학은 정의와 진리를 내팽개치고 세속의 욕망으로 가득한 신자유주의형 인간을 양산하는 곳이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면서 한국의 대학이 희망이었던 적은 없었다. 동물의 왕국처럼 승자만 살아남는 경쟁의 공간에서 학생들의 선택의 폭은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학 공공성의 실현, 확대, 강화가 절박했다. 그동안 대학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재정지원 확대, 국공립대 통합, 사립대 개혁, 비정규교수 문제 해결 등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모든 정권이 새로운 교육정책을 내세웠지만 대중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른 정책은 거의 없었다. 다들 백 년을 내다보고 정책을 만들었다지만 본인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하다. 이들은 대학 공공성이 무엇인지 몰랐고 알았다 해도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관적 예단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대학 붕괴의 근본적 원인이다. 최근 학령인구 감소와 지역 대학의 소멸화가 본격화되면서 통곡과 탄식이 난무하지만 속수무책이다. 정부의 대학 정책과 인식이 그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관하거나 방치할 수는 없다.

▲배성인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성공회대분회장
그래서 대학 공공성이 무엇인지 개념부터 다시 생각해 본다. 첫째, 민주적이어야 한다. 어느 집단이나 누군가의 의사에 반해 또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다수의 뜻이 비민주적인 경우를 셀 수 없이 목격했다. 대학은 민주적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에 어울리지 않는 법과 제도는 당연히 폐기되어야 한다. 차이는 다름이지 결코 차별이 아니다.

둘째, 수평적이어야 한다. 공동체에서 출발한 대학은 구성원 모두가 처음부터 주체로 만났던 것이다. 동등한 대학 주체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은 더 이상 학교에 없으며, 용납되지도 않는다. 대학의 위기는 평등한 주체들이 만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극복할 수 있다.

셋째, 공공성은 말 그대로 공공적이어야 한다. 대학은 이윤추구가 아닌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하고, 교육을 생산하는 인프라를 공적으로 소유하고 운영해야 한다. 대학은 경영이 아니라 운영을 하는 공동체이다.

대학 공공성 투쟁은 처절한 삶을 살고 있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 저항의 마지노선이 다가오고 있다. 누가 살아남을지 알 수는 없다. 다들 ‘내’가 살아남고 싶은데, ‘우리’ 같이 투쟁하자면서 ‘나’를 ‘우리’ 안에 가둔다고 불만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래서 대학 내 차별을 먼저 철폐하는 것이 대학 공공성 투쟁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차별이 없어지면 대학 내 주체들의 연대는 자연스러운 경로를 밟게 된다. 다음으로 사회적 연대의 실현은 보편타당한 상식이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삶의 환경에서 미래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곳이 대학이다. 그래서 대학을 희망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고된 노동과 질병 그리고 억압과 불평등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수많은 지식과 이론을 생산하고 전달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배성인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성공회대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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