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판사 이해돼”…제주지법서 강제추행 재판 참여한 그림자 배심원들
9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4층 대회의실에 모인 ‘그림자 배심원’(배심원 체험)들의 입에서는 아쉬움 섞인 말들이 터져 나왔다. 이날 국민참여재판(배심원 재판)에서 다루는 사건 내용이 누가 봐도 ‘유죄’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결과 뻔한데 굳이 국민참여재판?
이날 제주지법 제5형사부(재판장 김수일 제주지법원장)는 강제추행 및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위반(강제추행) 혐의로 구속된 정모(55) 씨의 국민참여재판을 심리했다. 동아일보는 이날 평결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그림자 배심원 자격으로 재판 전 과정에 참여했다.
정 씨는 지난 3월 6일 오후 5시 50분경 제주시 일도1동 ‘탐라문화광장’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던 A(19) 씨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뺏으려 하고, 저항하는 A 씨의 엉덩이를 여러 차례 쓰다듬은 혐의(강제추행)를 받고 있다. 또 정 씨는 A 씨의 일행인 B(16) 양의 엉덩이에도 손을 대려 했고, B 양이 이를 피하자 B 양의 어깨를 쓰다듬은 혐의(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위반)도 받고 있다.
오전 재판에서 검찰은 “피고인은 2019년 23개월 여아를 강제로 껴안은 혐의로 징역 2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는 등 전과 18범이다. 이 중 4건은 성범죄”라며 “피고인은 이번 사건에서 행위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추행의 의지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거 전력과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들이 느낀 성적 수치심을 보면 유죄가 충분히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오전 재판을 마친 뒤 제주지법 4층 대회의실로 이동한 그림자 배심원 9명의 고개는 갸웃거렸다. 유죄가 확실한 사건을 굳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 재판 절차 진행될수록 바뀌는 분위기
증인신문과 범행 폐쇄회로(CC)TV 시청, 검찰 구형, 최후변론 등이 이뤄진 오후 재판에서는 분위기가 살짝 변했다.
먼저 증인으로 나선 A 씨와 B 양의 증언 중 ‘접촉 강도’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정 씨가 피해자들의 신체를 만질 때 ‘두들겼는지’, ‘주무른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돼서다. 배심원도 재판장의 입을 빌려 A 씨에게 “(엉덩이를) 때린 거냐, 주무른 거냐”고 물었다. 증인석에 선 A 씨는 “때리는 방식으로 강도가 점점 세졌다”고 증언했고, B 양은 “(어깨를) 쓰다듬고 토닥토닥했다”고 했다.
이어 범행 상황이 담긴 CCTV 영상이 법정에서 1시간 이상 재생됐지만, 영상이 흐릿한 탓에 상황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구형에 나선 검찰은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범행을 저질렀다. 과거 성범죄로 처벌을 받으면서 어떤 행위가 추행에 해당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징역 3년을 구형했다.
반면 정 씨의 변호인은 “피고인이 행패를 부린 사실은 인정하지만 성적 목적을 갖지는 않았다. 당시 피고인은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다”며 “특히 두 명의 피해자 모두 접촉의 느낌을 ‘토닥토닥’이라고 표현했다. 강제추행이 성립되려면 강도가 굉장히 세야 한다”고 항변했다.
이 과정에서 정 씨의 불우한 과거도 꺼내졌다. 경남 출신인 정 씨는 18세가 되던 해 일자리를 찾아 제주에 왔지만, 일에 적응하지 못해 2001년부터 제주시 아라동의 한 천연동굴에서 20년 이상 생활했다. 정 씨는 2016년 경찰에 의해 발견돼 숙식 등 복지 지원을 받았지만, 공무집행방해, 성추행 등의 혐의로 교도소를 오갔고, 결국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천연동굴에서 은둔생활을 이어갔다.
● 고민 깊어지는 그림자 배심원
모든 심리가 끝난 뒤 그림자 배심원들은 모의 평의 및 평결을 위해 다시 제주지법 4층 대회의실로 향했다. 그러나 오전과 달리 얼굴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머릿속에서 범행 동기와 상황, 강제추행의 범위, 피해 정도 등에 대해 계산하고 있어서다. 오전까지 ‘악인’으로만 보였던 정 씨의 불우한 삶도 일부나마 참작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상존했다.
그림자 배심원들은 30여분 간의 평의를 진행한 끝에 A 씨에게 저지른 범행은 ‘유죄’, B 양에게 가한 범행은 ‘무죄’로 결론을 내렸다. A 씨의 경우 정 씨가 실제 중요 부위를 여러 차례 만졌고, 그 과정을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는 등 강제추행 혐의가 충분히 입증됐다고 봤다. 반면 B 양에 대해서는 정 씨가 실제 중요 부위를 만지지 않았고, 어깨를 쓰다듬는 행위 역시 실랑이 과정에서 우연히 만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무죄로 의견을 모았다.
양형은 징역 1년 6개월~징역 3년 사이에서 논의됐는데, 그림자 배심원 9명 중 8명이 징역 1년 6월을 선택했다. 나머지 한 명은 정 씨의 불우한 삶 등도 참작해야 한다며 범위에서 벗어난 징역 1년을 제시했다.
● 판사도 다르지 않았다
선고공판을 연 재판부는 정 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배심원 7명의 평결은 징역 1년 6명, 징역 9개월 1명이었다.
먼저 A 씨에 대한 범행에 대해 재판부는 “피고인의 행위는 법리적으로 추행에 해당한다고 평가할 수 있고, 고의도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배심원 7명 역시 만장일치로 유죄 의견을 밝혔다”며 유죄를 인정했다.
B 양에 대한 범행은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유죄를 입증하기 어렵다”며 “특히 배심원 7명 전원도 무죄로 평결했다. 국민참여재판 법률 취지에 비춰보더라도 배심원 평결을 가급적 존중해야 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림자 배심원으로 참여한 40대는 “뉴스에서 상습범의 형량이 너무 가볍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며 “하지만 오늘 재판을 통해 ‘죄’ 말고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모든 재판이 끝난 뒤 제주지법 관계자는 “사법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국민참여재판 및 그림자 배심원을 운영하게 됐다”며 “제주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은 이유는 전국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재판 지연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제주=송은범 기자 seb1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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