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젤라틴과 DNA의 차가운 '콜라보', 더위 식힐까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4. 7. 1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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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맞아 안양천 찾은 숭어들. 연합뉴스 제공

누구나 떠올리기 싫은 어린 시절 경험이 있기 마련이다. 필자에게는 스티로폼 배(뗏목)를 타고 안양천을 건너다 한쪽 다리가 빠져 무릎까지 젖은 일이 그런 예다. 물에 빠져 익사할뻔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싶겠지만 당시 안양천의 수질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물이 시커먼데다 악취가 진동했고 척추가 휘어진 기형 물고기가 나와 뉴스에서 다루기도 했다.

평소에는 안양천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는데 그날따라 아이들이 커다란 스티로폼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재미있어 보여 다가갔다가 "너도 타볼래?"라는 말에 엉겁결에 올라갔다가 중심을 잃은 것이다. 집에 와서 시커메진 신발과 바지를 벗고 발과 다리를 한참 씻었지만 찜찜했던 기억이 난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필자는 매일 아침 집 앞 안양천 지천의 천변길을 산책한다. 오리와 백로를 보는 건 일상이 됐고 얼마 전에는 가마우지까지 출몰했다. 녀석은 수심이 깊은 곳에서 잠수해 사방을 휘저으며 빠르게 헤엄쳤는데 아마도 물고기를 사냥하는 것 같았다. 얕은 곳에 서서 노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물고기를 콕 집어 잡는 백로는 사냥효율에서 도저히 경쟁이 안 될 것 같았다. 최근 개체 수가 많이 늘어난 가마우지를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새삼 안양천의 놀라운 수질개선을 얘기하는 건 요즘 읽고 있는 책 'Not the End of the World'의 내용에 공감해서이다. '세상의 종말이 아니다'라는 제목과 '우리는 어떻게 지속가능한 행성을 만드는 첫 세대가 될 수 있나'라는 부제에서 짐작하듯이 이 책의 저자 한나 릿치 옥스퍼드대 글로벌개발프로그램 선임연구원은 각종 데이터를 인용하며 과학기술이 지구의 미래를 밝힐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환경과 관련해서는 언론에서 연일 부정적인 현상과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수질이나 대기질 등 여러 지표가 과거에 비해 나아지고 있고 특히 서구사회는 지난 수천 년 이래 가장 깨끗한 공기와 물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대기질도 수년 전부터 점차 나아지는 것 같고 특히 올해는 봄철 몇 차례 황사를 빼면 놀라운 수준이다. 이게 일시적인 현상인지 한반도 대기질에 큰 영향을 주는 중국의 노력(책에 잘 나와 있다) 등에 따른 본질적 변화일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과거 하천 수질의 변화를 따라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중국의 대기 오염 물질 농도 변화를 보여주는 그래프로 2000년대 초 정점(최악)을 찍은 뒤 급격히 개선되고 있다. 우리나라로서는 반가운 현상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질소산화물, 이산화황, 블랙카본, 일산화탄소다. Not the End of the World 제공

● 냉난방 에너지 수요 계속 늘어

그럼에도 기후변화의 주원인인 에너지 문제와 플라스틱 쓰레기 같은 환경 문제는 여전히 상황이 나빠지고 있고 따라서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거론된다. 책에서도 쉽지 않은 문제라고 인정하지만 각국이 정책만 제대로 편다면 과학기술의 힘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와 쾌적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겹쳐 오늘날 인류의 에너지 소비량에서 냉난방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커져 몇몇 선진국에서는 40%를 넘어섰다. 우리나라도 냉방수요가 늘면서 여름이 되면 '최대전력수요 기록' 같은 뉴스가 종종 나온다.

쾌적함을 희생하는 절약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의 비율을 높이는 게 해결책이고 실제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따라잡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세계 온실가스배출량이 좀처럼 줄지 않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과학자들은 에너지를 쓰지 않고 냉각 효과를 보는 연구로 눈을 돌리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방식으로 여름철 실내온도를 5℃ 낮출 수 있다면 냉방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크게 줄 것이다. 이런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수동복사냉각이다. 복사냉각이란 들어오는 복사에너지보다 나가는 복사에너지가 많게 해 그 차이만큼 열이 빠져나가 온도가 낮아지는 현상이다. '수동'이란 온도를 낮추기 위해 에너지를 따로 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루 중 온도가 높은 낮에 수동복사냉각 효과를 내려면 햇빛을 최대한 반사하면서 동시에 그보다 긴 파장인 적외선, 특히 8~13㎛ 영역의 전자기파를 많이 내보내는 물질을 만들어야 한다. 파장 8~13㎛의 중적외선은 대기가 흡수하지 않는 영역으로 '대기의 창(atmospheric window)'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지표에서 복사되는 이 영역의 적외선은 대기를 통과해 저 멀리 우주로 빠져나간다.

지난해 11월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무기재료(세라믹)인 실리카로 만든 미세다공성 구조에 알루미나 나노입자를 분산시킨 물질인 '복사냉각 유리'를 만들어 습도가 80%에 이르는 고온다습 조건에서도 3.5~4℃의 수동복사냉각 효과를 봤다는 미국 연구진의 논문이 실렸다. 미세다공성 복사냉각 유리는 빛을 산란시키므로 불투명한 흰색이다. 

연구자들은 "수동복사냉각 물질이 상용화되려면 혹독한 조건에서도 오래 안정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복사냉각 유리의 내구성을 자랑했다. 그러나 알루미나 같은 금속 나노입자는 식물과 동물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알루미나 나노입자는 식물 뿌리로 침투해 밀과 옥수수를 비롯한 여러 작물의 성장을 방해한다. 복사냉각 유리가 상용화돼 쓰이다 폐기되면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 햇빛 가시광선의 104% 내보내

지난주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생체 분자인 젤라틴(단백질)과 DNA로 수동복사냉각 물질을 만들었다는 중국 쓰촨대 연구자들의 논문이 실렸다. 두 분자로 만든 에어로젤 벽돌로 외벽을 만들면 실내온도를 바깥보다 최대 16℃나 낮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어로젤은 부피의 90% 이상이 공기로 이뤄진 다공성 물질로 보통 실리카 같은 무기재료로 만든다. 그런데 생체분자인 젤라틴과 DNA로 어떻게 에어로졸을 만들 수 있을까.

최근 중국 쓰촨대 연구진이 젤라틴 단백질(protein)과 DNA로 만든 에어로젤은 자가치유력이 있고 재활용이 되고 폐기하면 빠르게 생분해되는 친환경 물질이다(A). 이 에어로젤은 햇빛을 반사하고 적외선을 내보내 복사냉각 효율이 뛰어나다(B). 입사량보다 더 많은 가시광선을 반사하는 건 자외선(UV)을 흡수해 가시광선 영역인 형광(fluorescence)과 인광(phosphorescence)을 내놓기 때문이다(C). 사이언스 제공

연구자들은 젤라틴(gelatin)과 DNA를 4대 1의 비율로 따뜻한 물에 잘 녹인 뒤 납작한 벽돌 모양의 틀에 부어 영하 196℃인 액체질소에서 급속 냉동한 뒤 아주 낮은 압력에서 말렸다.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결과 DNA와 젤라틴 혼합물인 3차원 그물망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에어로젤 구조가 나타났고 조성비를 따라 G4D1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G4D1 에어로젤의 밀도는 물의 6%인 0.06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렇게 만든 G4D1 에어로젤 벽돌의 옆면에 물을 묻혀 다른 벽돌의 옆면에 대면 마치 강력접착제를 쓴 것처럼 붙어 안 떨어진다. 물이 젤라틴과 DNA에 흡수되면서 수소결합이 생기기 때문이다. 건물 외벽에 쉽게 설치할 수 있다는 말이다. 

G4D1 에어로젤은 단순히 햇빛을 산란시킬뿐 아니라 햇빛의 자외선 영역을 흡수해 형광과 인광으로 다시 내보내는 광발광(photoluminescence) 특성도 지닌다. 바닥 상태의 전자가 자외선을 흡수한 뒤 에너지를 약간 잃은 뒤 다시 바닥 상태로 떨어지면서 파란 형광을 내고 일부는 추가로 에너지를 잃고 나서 바닥 상태로 떨어지면서 장파장 가시광선 인광을 낸다. 분석 결과 형광은 주로 젤라틴에서 인광은 주로 DNA에서 나오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가시광선 영역의 반사도는 입사량보다도 많은 104%에 이르고 근적외선도 입사량에 가까운 97.1%나 됐다. 게다가 중적외선도 방사율이 흑체의 90% 수준으로 꽤 높다. 그 결과 기존 물질보다 복사냉각 효과가 더 크다.

연구자들은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4.5, 4.2, 1.3㎝인 G4D1 에어로젤 벽돌 한 층으로 외벽을 만든 공간 내부의 온도를 측정했다. 북위 30도에 습도가 높은 청두에서 실시한 결과 평균 냉각 효과는 5.7℃로 잔뜩 흐린 때가 2.9℃였고 햇빛이 쨍쨍할 때는 무려 16℃에 이르렀다. 북위 24도이지만 고도가 높은 쿤밍에서 실시한 냉각 효과는 밤이 1.6℃이고 낮이 3.5~15.1℃에 이르렀다. 연구자들은 G4D1 에어로젤 벽돌로 외벽을 마감하면 건물 냉방에 드는 에너지의 68%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지난 4월 6일 쿤밍에서 실시한 G4D1 에어로젤 벽돌의 복사냉각 효과 실험 결과다. 낮에 햇빛이 강할 때는 주변보다 15.1도 낮다. 사이언스 제공

G4D1 에어로젤은 복사냉각 효과가 뛰어날뿐 아니라 자가치유 물질이고(균열이 생겼을 때 물만 묻혀주면 다시 붙는다) 재활용이 쉽고 폐기할 때 생분해성도 우수하다. 우리가 익숙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젤라틴과 DNA로 이런 물질을 만들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수년 전부터 시내버스가 하나둘 전기차로 바뀌더니 최근에는 마을버스도 전기차가 보인다. 필자가 어릴 때는 검은 매연을 내뿜고 다니던 버스가 많았는데 머지않아 디젤엔진 버스가 사라지고 그만큼 공기는 더 깨끗해질 것이다. 리튬배터리가 상용화된 지 30년 만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G4D1 에어로젤처럼 효율과 환경 모두에서 뛰어난 수동복사냉각 물질이 하루빨리 상용화되기를 기대한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10권),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가 있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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