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고였다는 말…운이 나쁜 `사고`란 없다

김미경 2024. 7. 1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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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는 없다
제시 싱어|456쪽|위즈덤하우스
사고 뒤에 감춰진 사회문제 고발
부실한 안전 시스템에 면죄부
피해자에게 책임·비용 전가 말고
기업, 규제기관에 책임 물어야
4일 오전 서울 중구 시청역 인근 역주행 사고 현장에 추모객들이 남긴 꽃들이 놓여 있다. 지난 1일 해당 교차로에서는 운전자 A씨가 몰던 승용차가 역주행하며 인도로 돌진해 9명이 사망했다(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1:29:300’.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이란 용어가 있다. 한 번의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 그와 관련한 수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통계적 법칙이다. 사소한 사고의 징후가 무시되면 결국에는 대형사고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연일 비극이 끊이질 않는다. 지난 1일 서울 시청역 인근에선 시민 9명이 역주행 차량에 치여 사망했다. 앞서 지난달 24일에는 경기 화성 리튬공장 화재로 23명의 근로자가 숨졌다. 지난해 한국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사람은 598명, 2551명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왜 사고는 흔한가. 우리 사회는 왜 사고에 무뎌보이는 걸까. 사고는 개인의 운이나 책임에 달린 것일까. 정말로 사고는 막을 수 없나. ‘사고는 없다’(위즈덤하우스·원제 There Are No Accidents)는 이런 질문들에 답하는 책이다.

사고는 불운의 결과가 아니다

책은 교통사고부터 산업재해, 재난 참사까지 지난 한 세기 동안 벌어진 ‘사고’의 역사를 추적한다. 방대한 문헌과 데이터를 검토하고 다양한 현장 인터뷰와 사례 취재를 통해 ‘사고’라는 말이 어떤 죽음과 손상을 감추고 반복하게 만드는지 밝혀낸다.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안전문제 활동가인 저자는 자전거 교통사고로 친구를 잃은 일을 계기로 ‘사고’에 천착했다. 그는 ‘사고’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많은 사건이 ‘사고’라는 말에 개인이 통제하거나 감당해야 할 문제로 뭉뚱그려진다는 것이다. 위험한 시스템에 면죄부를 줘 책임성은 사라지고, 취약한 사람들은 더 큰 피해로 내몰리게 된다는 지적이다.

책에 따르면, 사고의 책임을 인적 과실로 보는 프레임이 우세해지면서 ‘사고’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권력자들이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환경을 고치기보다 인적 과실을 탓하는 서사를 유포해왔다는 얘기다. 안전벨트 탑재를 의무화한 것은 1968년. 하지만 이 기술은 13년 전에 이미 만들어졌다. 1955년 미국 포드의 로버트 맥너마라 최고경영자는 경쟁사에 맞서 ‘생명을 살리는 패키지’를 선보였으나, 안전장치 도입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던 자동차 제조사들의 압력으로 판매는 조기 종료됐다. 안전벨트와 에어백이 의무화되기 전까지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란 그저 불운의 결과가 아니라는 견해다. 일상적 사고 뒤에는 취약한 환경, 정책 실패, 안전에 돈 쓰지 않는 권력, 계급 인종차별, 편견 등 수많은 요인이 있다고 진단한다.
지난달 6월 25일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리튬전지 공장 화재 현장에서 소방대원들이 추가로 발견된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
사고는 불평등…안전 취약자 위한 대책 필요

사고에는 불평등이 존재한다. 가난하거나 백인이 아니면 사고를 겪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건 이미 많이 알려진 연구 내용들이다. 예컨대 흑인의 사고 사망률은 백인보다 93% 더 높다. 미국에서 흑인이 화재로 죽을 확률은 백인의 2배다. 원주민(인디언)이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사망할 확률은 백인의 3배, 웨스트버지니아주 사람들은 이웃한 버지니아주 주민보다 사고로 죽을 확률이 2배 더 높다.

1950년대 미국 코넬대의 자동차 충돌 내구성 테스트도 한 실례다. 거의 모든 충돌 테스트 인형이 남성 신체(175㎝, 78㎏ 정도)를 모델화했던 것. 당시 여성이 전면 충돌 사고에서 사망 확률이 남성보다 최대 28%, 부상 확률은 최대 73% 높았다. 최근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로 숨진 근로자 23명 중 18명이 이주노동자인 점도 같은 맥락이다. 숨진 23명 가운데 18명이 이주노동자(중국인 17명, 라오스인 1명)이고, 17명이 여성이며, 이들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였다.

저자는 “인간이 실수하는 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실을 예상하고 그것이 생사의 문제로 이어지지 않도록 환경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고 조사 때 누가 실수를 했느냐를 찾는 데 집중하기보다 과실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 조건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방 대책은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맞춰 이뤄져야 하며, 사고의 사회적 비용을 피해자 개인이나 가족이 떠안는 지금의 구조에서 벗어나 위험성을 알면서도 방치하고 책임을 회피해 온 기득권자(기업과 규제 기관)들이 물도록 책무성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책은 미국 사례들을 인용하지만, 한국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청역 인근 도로 설계엔 문제가 없었는지, 보행자 보호 인프라와 가해 차량에 안전장치는 제대로 작동했는지, 다시금 질문을 던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것을 사랑과 분노의 행동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남겨진 일이자 우리가 가진 전부다.”

2일 지난 밤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한 서울 중구 시청역 7번출구 인근 사고 현장에 국화가 놓여 있다(사진=연합뉴스).

김미경 (midory@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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