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병 강제징집 피해 첫 인정…여전히 ‘국가유공자’ 제외
정부, 2008년 존재 인정…3만여명 확인
한국전쟁 당시 병역의 의무가 없는 만 18살 미만 미성년자였음에도 소년병으로 동원됐던 이들이 처음 국가로부터 공식 피해 인정을 받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9일 오전 제82차 전체위원회에서 이경종, 고 문제열, 장병율, 장성곤, 박태승, 고 하명윤씨가 신청한 ‘한국전쟁 중 소년병 참전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에 소년병 전수조사를 통한 병역수행 피해 규명과 이들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당초 미성년자에 대한 입대절차 진행을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보았다가 전체위에서 한차례 보류를 겪는 등 난항을 겪다가, “국가의 안전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수위를 낮춰 재상정해 의결했다.
주로 1932~1934년생인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본인들은 학도의용군과 구별되는 소년병으로 병역 의무가 없었고 △정부가 의사결정이 완전하지 않은 미성숙한 소년병을 강제징집 및 자원 모집하는 과정에서 절차적, 법률적 문제점이 있었으며 △소년병이 된 아동에 대한 피해 사실 확인(생명권 침해 및 정신적·육체적 피해, 학습권 등 사회권 침해 등)이 필요하고 △소년병에 대한 국가의 해태(懈怠)와 책무를 확인하여 실제적 명예 회복을 원한다며 진실규명을 요청했다.
소년병은 흔히 학도의용군과 혼용해 사용됐지만, 병적 기록의 유무 및 나이, 국적 등에 따라 그 신분이 구별된다. 학도의용군과 구별되는 소년병은 학적 소유 여부를 불문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참전한 18살 미만 미성년자로서, 군번을 부여받아 정규군(현역병)에 편입된 군인 또는 그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의미한다. 2000년부터 소년병의 예우와 지원을 위하여 현행 법률을 개정하거나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려고 했던 국회는 소년병이란 ’6·25전쟁 당시 병역의 의무가 없음에도 전쟁에 참여하여 군번을 받은 18세 미만 소년들’이라고 정의했다.
한국전쟁 기간에 대한민국의 소년병은 약 3만여 명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소년병은 군번과 계급이 있는 현역 정규군 신분이었기 때문에 1951년 2월28일 정부의 ’학도의용군 해산명’과 같은 해 3월16일 ‘학생들의 귀가 복교령’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953년 7월27일 정전 협정 뒤에도 일시에 제대하면 인력 차질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4~5년간의 장기 군 복무를 해야 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들은 지원 입대 혹은 강제 징집되어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중공군 참전 등과 같이 전황이 불리한 시기에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공헌하였다”고 판단했다.
진실규명 대상자 이경종씨의 아들 이규원(62)씨는 10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아버지는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때인 1951년 1월 대학생 형들에 끌려 입대해 1954년 12월 제대했다. 군대에 다녀오고 인생이 바뀌었다”며 “아버지는 세탁소를 하며 자식들을 키웠고, 피해 확인을 위해 1996년부터 29년을 노력했는데, 진실규명이 됐다고 하니 기쁘기보다 슬프다. 아버지는 지금 요양원에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아버지는 평소에 ‘내가 군대 갔는데 왜 갔는지 모르겠다. 나같은 소년병이 많이 죽었다는데 얼마나 죽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다”며 “그동안 아무도 이 문제에 관심을 안 가져주었다”고 덧붙였다. 이경종씨는 생전 아들에게 “군번이 2개였다. 1951년 처음 받은 군번이 다른 탈영병의 군번이라는 것을 나중에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는 “소년병의 자원입대 및 강제징집 모두 한국전쟁 당시 법령상 근거가 충분치 않았다는 점이 확인된다”면서도 “설사 법령상 근거가 충분치 않았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 당시 소년병에 대한 전체적인 징집절차가 위법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다만 “최근 UN 아동권리위원회가 전직 소년병은 무력 충돌의 희생자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표명한 것을 고려하여 정서적, 심리적으로 취약하여 온전한 의사 결정이 어려웠던 대한민국 소년병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전쟁을 직접 참여하여 겪었던 피해 사실에 대한 규명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진실규명 대상자 중 한 사람인 1934년생 이경종씨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1950년 후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남하하게 되자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은 1950년 12월18일 한 축현국민학교(초등학교)에 집결하여 ‘현역병 입대를 위한 참전 발대식’을 가진 후 남행길에 나섰고 그 대열에 끼어 동행했다. 후에 약 1300여 명과 함께 통영으로 가서 충렬국민학교에 있는 방위군수용소에 있다가 부산으로 이동하여 육군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고 진술했다. 진실화해위는 이경종씨에게 “육군 제2훈련소에 입대할 당시 나이가 적거나 키가 작다거나 부모의 동의가 없다는 이유로 입대를 제지당하지 않았는지” 확인을 구했는데, 이경종씨는 “그러한 사실이 없다. 나처럼 (나이가) 어리면 사람을 아예 안 뽑아야 하는데 무조건 뽑았다”라고 진술했다.
국가는 한국전쟁 이후 약 60년간 소년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2008년 6월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에 의해 소년병에 대한 실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재 소년병은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참전유공자법)에 의거, 비군인 참전유공자로 간주하여 국가유공자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고 국가는 별도의 지원 및 예우는 하지 않고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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