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진보 정치인 그린 드라마 ‘돌풍’…민주당 사람들은 어떻게 봤을까?
*이 글에는 드라마 ‘돌풍’의 스포일러가 포함됐습니다.
“너도 주말에 ‘돌풍’ 봤어?”
지난 월요일(8일) 국회에서는 이런 인사가 자주 들렸습니다. ‘돌풍’은 지난달 28일 공개된 넷플릭스 12부작 드라마입니다. 지난주 이 드라마의 인물 설정이나 여러 장면이 실제 정치인과 한국 사회에 있었던 정치적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입소문이 국회에 돌았기에, 주말 사이에 몰아본 정치권 관계자들이 꽤 되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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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정치를 다룬 한국 드라마가 오래간만에 나온터라 정치권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낸 것 같습니다. 정치 고관여자인 이들 중 다수는 미국의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로 꼽기도 합니다. 여기에 ‘돌풍’은 공개 직후 넷플릭스의 ‘오늘 대한민국의 TOP 10 시리즈’ 1위에 계속 올라와 있는 만큼, 안 볼 이유가 없겠죠. (물론 쉬는 날까지 정치 드라마를 봐야 하냐며 질색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돌풍’은 부패한 정치권력을 응징하려는 국무총리이자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박동호(설경구)와, 한때 개혁을 꿈꿨으나 재벌과의 유착 관계에 빠진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의 권력 전쟁을 다룹니다. 첫 화 시작부터 ‘대통령 시해’라는 극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박동호가 초심을 잃고 비리를 저지른 대통령 장일준(김홍파)에게 하야를 요구했다가 누명을 쓰자 대통령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이죠.
사실 첫 화에서는 이들이 어느 진영 정치인들인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이들이 민주진보 진영 정치인들인 것을 알려줍니다. 장일준이 인권변호사 출신인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연상시킵니다. 정수진과 그의 남편 한민호(이해영)는 학생운동권, 정확히는 각각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문화선전국장과 의장 출신으로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 민주당 관계자들이 조금 더 감정 이입을 하면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과몰입’할 준비가 된, 현실 정치에 종사하는 민주당 관계자들은 이 드라마를 어떻게 봤을까요?
일단 긍정적인 반응부터 살펴보면, “전개가 빠르고 카타르시스를 줘서 주말 시간을 보내기 좋았다”(민주당 의원실 선임비서관 ㄱ씨),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는 말과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은 힘이 없다’는 자조 등이 현실 정치를 잘 보여주는 대사였던 것 같다”(민주당 정치인 ㄴ씨)는 말이 나옵니다.
부정적 반응도 많았습니다. 특히 86세대 사이에서는 정수진과 한민호를 통해 ‘타락한 운동권’을 그려내는 방식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86세대인 민주당 관계자 ㄷ씨는 “운동권을 모욕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90년대 운동권 출신인 민주당 의원실 보좌관 ㄹ씨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 젊은 시절 갖고 있던 신념을 현실정치인이 되면서 잃어버리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릴 것 같다는 기대를 갖고 보기 시작했는데, 한민호 캐릭터 등을 희화화 해버리니 조롱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민주당 관계자들은 이런 캐릭터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30대 민주당 관계자 ㅁ씨는 “기득권이 된 86세대를 악으로 규정한 것이 새로운 정의를 바라는 밀레니얼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켜준 것 같다”며 “민주와 진보를 참칭하면서 자기 안의 민주와 진보를 잃어버린 몇몇 민주진영 정치인들에게 ‘경고’를 날렸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30대 의원실 비서관 ㅂ씨는 “드라마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열을 내는 선배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간다”면서 “오히려 민주진영이 권력을 가진 세계관이라서 신선했다”고 말했습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도 페이스북에 올린 감상평에서 “이제 민주진보진영도 이런 비판과 풍자의 소재가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며 “‘돌풍’ 속에서 보수진영은 정말 ‘쩌리’(비중이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 그 자체다. ‘돌풍’ 보고 화가 날 사람들은 민주당이 아니라 지금 한창 전당대회를 하는 국힘(국민의힘) 쪽”이라고 했습니다. 매력적인 주인공 캐릭터는 다 민주진영 인사고, 보수진영 인사인 야당 대표는 공안검사 출신에 태극기 부대를 몰고 다니는, 민주진영 앞에서 무력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많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ㄴ씨는 “시민들을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기자회견 한 번에 좌지우지되는 무지한 이들로 그려놓은 점이 아쉬웠다”고 했고, ㅁ씨도 “노조가 국무총리의 지시로 청와대 진격 여부를 결정한다는 식의 설정이 사람들이 의회나 노조에 지닌 안 좋은 인상을 극대화해 과하게 적폐로 만든 점이 불편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돌풍’은 정치 드라마일까요?
대부분은 정치인이 나오긴 하지만 정치 드라마로 볼 수는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9화까지만 봤다는 ㄹ씨는 “정치 드라마의 외피를 쓴 복수극”이라며 “무대는 국회지만 갈등을 조정하고 여러 이해관계자가 얽혀서 만들어내는 정치 행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보좌관으로서, 박동호의 비서가 주체적이지 않고 그림자에 그치는 모습이 실망스러웠다”고 했습니다.
‘돌풍’의 박경수 작가는 “이미 낡아 버린 과거가 현실을 지배하는 답답하고 숨 막히는 오늘의 현실을 리셋하고 싶은 갈망에서 시작한 작품이다. 이제는 초인이 답답한 세상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토대를 만들기를,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니까 드라마에서라도 쓰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드라마를 ‘판타지’로 봐달라는 당부입니다. 이 점이 정치권 종사자들의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초인 같은 사람이 실제 우리 사회에 있었던 정치적 사건을 단시간에 경험하며 그간 풀지 못했던 갈등을 한 번에 해결한다는 느낌이 드니, 마지막에 가서는 현실 정치와 대비되며 오히려 허무했어요. 도저히 판타지 없이는 더 좋은 나라를 만들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ㄱ씨).”
드라마는 끝나도 현실은 계속되기에, 카타르시스보다는 씁쓸함이 더 큰 듯합니다.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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