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출산, 여유 없는 삶의 그늘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한겨레 2024. 7. 1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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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윤석열 대통령이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는 뉴스를 봤다. 이제 초저출산 대책을 임기 만료까지의 주된 국가 정책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발표한 것이다. 매우 비장하게 들리는 선언이었지만 이는 처음으로 마련된 저출산 대책도 아니다. 한국 저출산 대책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이 수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때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저출산 대응 예산으로 지출된 돈만 해도 280조원 정도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저출산 대응과 관련된 한국의 정부 지출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가족 지출’(아동수당, 육아휴직 급여, 보육 서비스 지출 등)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한국은 1.37%에 불과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은 무려 2.12%나 된다. 그래도 노무현 정부 때부터 시작해서 보육·주거 지원 등 신혼·육아 가정을 위한 나름의 복지망을 어느 정도 구축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저출산 대책이 시작된 2006년에 1.13이었던 출산율은, 올해 들어 아예 0.68까지 낮아질 전망이다. 세계 최저인 이 초저출산율을 이번에 발표된 대책으로 과연 더 이상 추락하지 않게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여태까지의 대책도, 윤 대통령이 발표한 새 대책도 초저출산의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조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근본 원인은 바로 ‘여유의 부재’다.

과연 번식이란 인간의 근본 욕구일까? 그 유명한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에서는 성과 번식이 일차적 근본 욕구로 되어 있지만, 이는 매슬로의 논문이 발표된 1943년의 ‘상식’과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1943년 당시는 선진국들도 포괄적인 노년연금제도를 운영하지 못했다. 세계인의 대다수에게 노년에 부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당시에는 ‘자녀’였고 번식은 결국 노후 대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그때와는 천양지차다. 한국처럼 노년 연금제가 부실한 저(低)복지 선진국에서도 ‘부모를 부양하는 자녀’란 점차 옛날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즉, 번식은 더 이상 노후 대책일 수 없다.

그렇다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번식이란 무엇일까? 결국, 매슬로가 최고의 욕구 단계 중의 하나로 설정한 자아실현의 일종으로 번식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도 성장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스스로 더 완전한 어른이 된다. 동시에 아이의 존재는 노후 대책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일정한 기간 고독을 달랠 대책 정도는 된다. 아이가 있다면 만인이 서로에게 무관심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인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 그래서 외로움이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는 북유럽 국가들은 출산율이 오히려 비교적 높은 편이다. 실제 덴마크의 출산율은 1.72나 되고, 스웨덴도 1.67에 이른다. 하지만 번식이 아무리 고독 대책이나 자아실현 차원에서 중요하다 해도 결코 현대인의 일차적 근본 욕구는 더 이상 아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번식이란 사치다. 할 수 있으면 좋지만, 못 하면 그냥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사치를 누리자면 개인에게 여유가 필요하다. 바로 그 여유가, 부자나라 한국에는 없어도 한참 없다. 나라는 부자고 임금도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속하지만, 특히 주거 내지 사교육 등 비용이 과중하고, 최근에 생활물가까지 비정상적으로 올랐다. 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가 100.5%로 세계 4위가 된 것은 이런 사정에서 비롯됐다. 이는 유로존보다 2배 이상이고, 미국(73.1%)보다도 한참 높다. 버거운 빚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연 2세 계획은 쉬운 일일까?

금전적으로도 가면 갈수록 여유가 없지만, 그것보다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게 한국형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한국 직장인의 하루 평균 근무 시간은 9시간47분으로, 선진국 중에서 여전히 제일 긴 편에 속한다. 평균 수면 시간은 6시간41분으로 노르웨이 직장인보다 거의 한시간이나 짧다. 시간 빈곤과 함께 직장 안정성의 빈곤은 한국인에게 여유를 앗아간다. 전체 한국 직장인의 약 10%와 14%만이 각각 공공부문과 대기업에서 일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76%는 과연 어디에 고용된다는 말인가? 이들은 언제 위기에 빠져 망하거나 감원 바람이 불지 모를 중소·영세 업체에 다닌다.

윤 대통령이 비장한 말투로 제시한 초저출산 대책 중 하나는 “현재 6.8%(2022년 기준)에 불과한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을 임기 내에 50% 수준으로 대폭 높인다”는 것이다. 포부야 좋지만, 늘 위기인 중소기업에서는 사장의 눈 밖에 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육아휴직을 요구하기 쉽겠는가? 아빠 출산휴가를 기존의 10일에서 20일로 늘리겠다는 이야기도 ‘인구 국가비상사태’ 선언에서 나왔는데, 예컨대 전체 고용 인구 중 37%를 차지하는 비정규직에게도 그 이야기가 실현 가능하게 들릴까?

아마도 번식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여유의 종류는 심리적 안정일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경우, 우리가 번식을 하면 우리 유전자와 함께 사실상 자녀에게 우리의 대략적인 사회적 위치도 물려준다. 2020년대의 한국에서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 되었고, 심지어 하급 사무직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의사·변호사 등 고급 전문직에 오르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까 본인이 가진 사회적 위치에 어느 정도 만족해야 안심하고 출산에 착수할 수 있다. 그런데 불안정 일자리나 영세·중소기업 등 2차 노동 시장을 죽어도 벗어날 수 없는 다수의 한국인에게는 과연 그게 쉽겠는가?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이 시대에 출산은 인생의 궤도를 완전히 바꾸는, 아주 힘든 개인적인 결정이다. 그런 결정을 하자면 개인에게 경제적 여유 외에 시간적 여유, 그리고 안정적 직장이 주는 심적 여유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여유를 한국인들에게 주려면 한국형 자본주의 모델에 근본적 변혁이 요구된다. 보편적 복지국가, 불안 노동 없는 사회를 향한 그런 변혁이 없는 이상, 윤 대통령이 말하는 초저출산 대책은 그저 용두사미로 끝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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