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교환에게 영화란? “수단이 되지 않는 것”
끅끅끅끅. 정말 웃길 때 배우 구교환은 이런 소리를 낸다. 특히 말끝에 웃음이 따라붙어 마지막에 한 말을 못 알아들을 때가 잦았다. 놓친 말이 뭐든지 간에 따라 웃게 됐다. 6월17일 영화 〈탈주〉 시사회에서도 그가 등장하자 극장 안 공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입을 뗄 때마다 관객석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촬영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편안한 분위기를 위해 집중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시덥지 않은 농담을 많이 던진다는 그가 〈시사IN〉과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 “수많은 라운드(인터뷰)를 거치면서 제 화술이 늘었습니다. 무슨 얘기부터 할까요?” 네 시간 연속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한 날이었다.
7월3일 개봉하는 〈탈주〉는 휴전선 인근 북한 최전방 부대를 배경으로 한다. 10년 동안 군에 복무한 규남(이제훈)이 제대를 앞두고 그동안 준비했던 탈북을 실행에 옮긴다. 계획을 눈치챈 부대 내 병사가 먼저 탈주를 시도하는 바람에 일이 꼬여 말리려던 규남까지 탈주병으로 체포된다. 조사를 위해 부대로 온 보위부 장교 현상(구교환)은 어린 시절 인연이 있는 규남을 ‘탈주병 잡은 영웅’으로 둔갑시켜 실적을 올리려고 한다. 그럼에도 규남의 탈주는 계속되고 일을 바로잡기 위해 현상이 그를 쫓는다.
주인공 규남 역을 맡은 이제훈 배우는 영화 제목처럼 94분 러닝타임 내내 탈주한다. 첫 장면도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빛 아래 남쪽으로 질주하는 그를 비추며 시작한다. 주인공의 탈주 시도는 실패하는 듯하지만 이어지고, 안 되는구나 싶을 때 의외의 길이 열린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이종필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이 감독은 비행기 바퀴에 몸을 묶은 채 다른 나라로 밀입국했다는 아프리카 청년들의 기사를 접하고 이틀 후 〈공작〉과 〈수리남〉의 권성휘 작가가 쓴 영화 〈탈주〉 시나리오를 읽었다. 며칠 뒤 만난 친구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했다. 발버둥 치며 살지만 행복하지 않다고 눈물을 흘렸다. 기사와 시나리오, 친구의 근황을 지나며 ‘정해진 운명에서 이탈해 자신만의 길을 가려는 인간의 이야기’를 만들게 되었다. 귀순 병사의 탈북기라기보다 탈주를 향한 인간 보편의 욕망을 그려내기로 했다. 목표가 ‘시간 순삭(순식간에 삭제)’이고 러닝타임을 더 줄일 수는 없을까 고심했다는 감독은 결과적으로 그 목표를 이뤘다. 긴장감 때문에 94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 어딘가를 벗어나려는 ‘탈출’보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내달리는 ‘탈주’가 적확하다.
시간을 삭제하는 또 다른 한 축은 구교환이다. 규남을 쫓는 추격자 현상으로 등장하는 첫 신, 그가 바르는 립밤이 얼굴보다 먼저 등장한다. 북한의 고위급 장교와 립밤이라니. 그래서 궁금해진다. 핸드크림을 바르고 가르마와 옷차림이 단정한 현상은 추격하는 처지인데도 여유롭다. 구교환은 현상 캐릭터를 이렇게 분석했다. “외적인 면을 꾸미는 친구일 수도 있지만 포마드 바른 머리나 재킷에 신경 쓰는 등 계속해서 겉을 꾸미는 걸 보면서 오히려 불안감을 외형으로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찍을 때마다 ‘이직하는 기분’
구교환은, 규남이 목표를 향해 직진하는 캐릭터라면 현상은 ‘곡선을 그리는 비선형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규남보다 감정의 진폭이 큰 편이다. 상류층이지만 체제의 한계 때문에 원하는 피아노를 계속할 수 없는 유학파 출신이다. 몸으로 탈주하는 규남과 달리 현상에게서는 ‘내면의 탈주’가 연상된다. “허튼 생각 말고 받아들여. 이것이 네 운명이야.” 규남을 향한 대사는 스스로를 향한 말이기도 하다. 구교환은 인물의 변화에 주목했다. “어떤 신에서는 규남을 미치도록 잡고 싶어 하고 어떤 신에서는 도와주려고 한다. 만일 현상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태도를 유지했으면 아마 내가 (이 역할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다.”
〈탈주〉에 대중이 첫인상을 갖게 된 때는 2021년 청룡영화제다. 시상을 하러 나온 배우 이제훈이 손하트를 날리며 공개적으로 말했다. “구교환 배우님, 꼭 같이 연기하고 싶습니다.” 구교환의 캐스팅이 확정되기 전이었다. ‘배우들의 배우’라는 수식어를 얻을 만큼 영화인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 있는 구교환이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그때그때 다르다. 선택의 이유는 감독일 때도, 영화에 삽입된 음악일 때도 있다. 분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뭐든 하나만 그를 매혹시키면 ‘꽂히는’ 편이다. “시나리오 너머 어떤 감정들이 잘 설득되지 않더라도, 감독님이 충분한 동기를 만들어줄 거라 믿고 들어갈 때도 있고, 상대 배우 때문에 할 때도 있다. 이번에는 이제훈 배우, 이종필 감독이 작용했다. 그리고 또 하나, 현상이 처음 등장할 때의 얼굴과 마지막 얼굴이 다르게 읽혀 너무 궁금했다. 그 얼굴을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독립영화계의 스타로 불렸다가 어느 순간부터 독립영화, 상업영화 가릴 것 없이 ‘한국 영화의 근황’이 된 구교환. 빌 머레이와 주성치를 보며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그는 삼수 만에 서울예대 영화과에 입학했다. 입시를 준비할 당시 배우 하정우에게 과외를 받기도 했다. 입시 연기는 정형화되기 마련인데 구교환에겐 남다른 감성이 있었다고 하정우는 회상한다. 2008년 윤성현 감독의 〈아이들〉로 영화에 데뷔했고 〈남매의 집〉 〈겨울잠〉 등 독립영화에 출연했다. 2017년 〈꿈의 제인〉에서 트랜스젠더 제인 역을 맡아 백상예술대상 남자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2020년 연상호 감독의 좀비 아포칼립스 〈반도〉에서 서 대위로 출연할 당시 독특한 목소리와 정형화되지 않은 빌런 연기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연상호 감독은 그를 영화 〈조커〉의 주인공 호아킨 피닉스에 비유했다. 2021년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에서 북한 대사관 참사관으로 등장한 데 이어 넷플릭스 드라마 〈D.P.〉에서 헌병대 군탈체포조 조장으로 분했다. 2022년 티빙 드라마 〈괴이〉에서 고고학자 역을 맡았고 올해는 〈기생수: 더 그레이〉에 출연했다.
구교환은 배우 겸 감독이다. 2011년 단편영화 〈거북이들〉로 연출을 시작해 2015년 이옥섭 감독과 함께 연출한 영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제14회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 국내 경쟁 대상을 받았다. 2019년 이옥섭 감독의 장편 데뷔작 〈메기〉에서는 각본·제작·편집·주연을 맡았다. 어느 날 한 병원에서 성관계가 연상되는 엑스레이 사진이 발견되며 시작되는 이야기로, 구교환의 연기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개가 이목을 끌었다. 구교환과 이옥섭이 함께하는 프로젝트 ‘2x9HD’가 유튜브 채널로 개설되어 있어 그가 만든 단편영화를 볼 수 있다.
많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영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은 첫 연출작이다. 공개가 안 된 작품으로 제목은 〈춤〉, 혹은 〈무제〉다. 대학에 다닐 때 만든 단편영화다. “처음으로 용기 내어 연출을 해봤고 그때부터 영화를 계속하는 동력이 생겼다. 만들기 전까지 되게 두렵고 어려웠는데 만드니까 다음에 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출이 연기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감독마다 세계관과 취향이 다르고 구 감독 본인도 마찬가지라, 영화를 새로 찍을 때마다 새 직장에 ‘이직하는 기분’이라고 한다.
“프레임은 거짓말 안 한다”
이력 때문인지 그는 인터뷰에서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해야 했다. “모든 영화를 연기할 때 ‘지금’의 에너지로 관객을 붙들려고 한다. (독립영화를 한다고) 200원짜리 연기를 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 똑같다. 이번에 현상을 연기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연기를 한다. 대중은 (독립영화, 상업영화로) 나눌 수 있어도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마음먹지 않는다는 게 맞겠다.” 연출도 계속하고 있다. “거창한 건 아니고 〈메기〉같이 원래 했던 걸” 한다. 올해 처음으로 장편영화를 연출할 계획이다. 그는 “언제나 연출을 하고 있었고 언제나 사람들이 제 영화를 많이 봐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현재 구교환과 〈왕을 찾아서〉를 작업 중인 원신연 감독은 배우 구교환을 두고 ‘카메라 앞에서 익숙함과 반복, 규칙과 예상을 늘 박살내 버린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구교환이 화면에 등장하면 관객은 긴장하게 된다. 어떤 역할이든 예상을 비켜가기 때문이다. 팬들은 그가 관객을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스크린을 좇는다. 본인이 생각하는 연기자로서의 약점과 강점은 뭘까? “농담이 아니라 약점은 강점을 모른다는 거고, 강점은 약점을 모른다는 것 같다. 나는 내가 기준이다. 관객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취향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고 그걸로 관객이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다. 연출을 할 때도 똑같다. 만들 때는 제 것이고 공개가 되면 관객들 것이다.”
왜 사람들이 구교환에게 열광하는지 좀 더 파고들자 그가 말했다. “진짜 이런 거 얘기하기 싫은데 두 번째 물어서 피할 수가 없겠다. 좋아하는 게 보일 거다. 현장에서 연기하는 게 저로선 너무 즐겁고 재밌다. 아마 내 연기에서 내가 현장을 얼마나 좋아하고 즐기고 있는지 드러나지 않을까? 프레임은 거짓말을 안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막 사랑하지는 않지만 꽂힌 건 확실히 좋아하는 편”이라는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동방불패〉다. 예전부터 〈타이타닉〉을 좋아한다고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시네필(영화 애호가)’로 오해하는데 사실 〈대부〉도 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영화 얘기를 나누기 때문에 인터뷰를 하고 나면 항상 ‘영화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며, 뭐든 넓고 얕게 좋아하는 편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레트로 게임에 빠져 있다. 스토리텔링을 쭉 따라가는 고전 RPG 게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창세기전〉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목소리 톤이 가장 올라갔다. 음악 플레이리스트는 윤상이었다가 레드벨벳이었다 유재하로 이어지고, 한 평 정도의 공간만 있으면 맨몸으로 할 수 있는 타바타 운동을 로케이션 촬영 때도 즐겨 한다.
구교환에게 영화란? “수단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영화 그 자체로 즐겼으면 좋겠고 그 과정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에게 연기는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다. “내 감정을 내가 만들 때도 있고, 감독이 혹은 상대 배우가 만들어줄 때도 있다. 영상 작업이 흥미로운 이유는 혼자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내가 해내야 하는 지점도 있지만 감독과 배우를 ‘믿고 가야’ 하는 면도 있다.”
구교환은 인터뷰 도중 몇 차례 ‘자신의 시간’을 가졌다. 다른 데서 했던 말과 다른 답변을 하고 싶다며 30초만 달라거나, 적확한 답이 아닌 것 같다며 정정하기도 하면서 유연하게 시간을 썼다. 짧은 러닝타임의 인터뷰에서도 배우 겸 연출자였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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