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조의 만사소통] 망각에 대해

관리자 2024. 7. 10.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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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미'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다.

그때부터 망각을 친구처럼 데리고 산다.

아빠·엄마·자식·월급쟁이 등등의 타이틀 때문에 부양하고, 돈 벌고, 자리를 지켜야 하는 등등의 의무를 망각하는 것.

이런 망각을 하기 위해 대회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잠시나마 나와 자유로운 소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잊어버리고 비우는 것, 이게 곧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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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면 자꾸 잊어버린다?
그럴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모든 것을 기억해야만 할까?
비우면 새로운 것들 차올라
나·타인·세상과 ‘소통의 시간’
삶의 공백 있어야 행복해져

‘백치미’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다. 뭘 물으면 엉뚱한 대답을 하기 일쑤고, 뭘 자꾸 까먹는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대화 도중에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사람은 누구?’라는 질문이 나왔다. 삼척동자도 다 알 만한 답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놈의 답은 ‘김삿갓’이었다. 순간 팍 터졌다. 배꼽 잡고 웃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말이 있다. 나도 그렇다.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어제 만난 친구의 이름이 금방 생각나지 않고, 며칠 전에 먹은 저녁 메뉴가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다. 겁난다. 혹시 치매가 아닌지. 모든 기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아내와 자식들도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닐까?

고백하건대 나도 망각병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면 스토리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몇편의 영화가 막 뒤섞인다. 30대 무렵부터 그랬던 것 같다. 이걸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부분 기억상실증이 아닐까? 초기 치매가 아닐까? 온갖 걱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그 원인을 따져보니 프로듀서(PD)를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직업적으로 많은 영상을 보고 이걸 편집하고 만드는 게 일상이다보니 영상에 대한 기억이 섞이는 것 같다. 물론 PD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영화 이외에는 다 괜찮다. 드라마·다큐멘터리 등은 오케이. 영상 이외의 일상생활에서의 기억도 오케이. 그때부터 망각을 친구처럼 데리고 산다.

그런데 꼭 모든 걸 기억해야만 할까? 뇌의 용량이 있는 것이고, 또 비워야 새로운 게 차오를 것이 아닌가? 망각하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 왜 망각을 곧 치매로 연결시킬까?

가끔 비우려는 노력을 한다. 그래서 아지트를 많이 만든다. 아지트에서는 왠지 잘 비워진다. 멍하니 한강물을 바라보기도 하고, 마당을 찾아온 새들의 몸짓에 넋이 나가고, 행여나 길고양이가 창문 밖을 지나가면 와우 웬 횡재냐는 듯 속으로 쾌재를 외친다. 쓰윽 지나가는 길고양이의 기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압권이다. 또 비라도 내리면 비에 젖은 흙냄새와 또닥또닥 빗소리에 온 정신을 뺏기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비워지고 새로운 것들이 차오른다. 잊어버리니 새살이 돋아난다.

멍 때리기 대회와 낮잠 자기 대회가 열리는 이유도 바로 ‘비우기’ 위해서가 아닐까? ‘잊어버리기’ 위해서일 거다. 나를 규정하는 온갖 타이틀을 잊는 것. 나의 의무를 잠시 동안만이라도 잊는 것. 아빠·엄마·자식·월급쟁이 등등의 타이틀 때문에 부양하고, 돈 벌고, 자리를 지켜야 하는 등등의 의무를 망각하는 것. 이런 망각을 하기 위해 대회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잠시나마 나와 자유로운 소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잊어버리고 비우는 것, 이게 곧 소통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비우는 것이 곧 소통이라니. 그런데 사실이다. 비우는 것만큼 소통다운 게 없다. 비우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들이 품에 안긴다. 뺨을 스치는 옅은 바람, 진한 흙냄새, 영롱한 이슬, 경쾌한 새소리 등 세상 모든 게 나의 세포를 일깨운다. 세포 하나하나가 새롭게 살아 움직이며 온 몸과 온 맘을, 그야말로 ‘오픈’, 활짝 열게 만든다. 더불어 내가 세상과 합체되고 세상이 나요, 내가 곧 세상이 된다. 이 기막힌 소통의 맛을 본 사람들이 더러 있으리라. 비울수록 행복해진다는 그 맛을.

대동강 물을 과연 누가 팔아먹었을까? 백치미, 그놈은 이제 알려나?

김혁조 강원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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