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침탈 가담’ 日 1만엔권 인물 후손들이 한국에 남긴 말

김동현 기자 2024. 7. 10. 00: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46]
’일본 자본주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국내선 ‘일제 조선 경제침탈 가담자’ 비판
후손들 “한일관계 도움된다면 인터뷰 응하겠다”
이들에게 ‘에이이치 당시 의도 뭐였나’ 물으니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
일본 내면 풍경, 살림, 2014

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5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지난 3일 발행된 1만엔 신권 인물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1840~1931)/그래픽=김하경

지난 5일 본지 경제 섹션 위클리비즈(WEEKLY BIZ) 커버 스토리를 통해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1840~1931)의 이야길 소상히 전해드렸습니다. 이번 취재를 위해 직접 도쿄로 건너가 에이이치의 증손자이자 시부사와가(家) 당주인 시부사와 마사히데(99), 또 에이이치의 고손자이자 마사히데의 조카인 시부사와 겐(63)을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오늘 방구석 도쿄통신은 분량 관계로 기사에 담지 못했던, 에이이치의 후손들이 한국에 남긴 말을 인터뷰 전문(全文)으로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아래 기사를 읽지 않으셨더라도 이번 기사를 보는 데 문제는 없으나, 시간이 되신다면 한번 읽어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업 500곳 세운 ‘자본주의 설계자’, 日은 왜 그를 120년만에 소환했나 ☞ chosun.com/economy/weeklybiz/2024/07/04/3RTVILQVSVCQVCFC7C5LWOOONE/

시부사와 에이이치, 대한제국서 일본 지폐 발행 주도… 경제 침탈 비판도 ☞ chosun.com/economy/weeklybiz/2024/07/04/C6R2LW6GONHYPDAA6NJV7M6I2M/

난 쓰레기를 줍기로 했다 ☞chosun.com/economy/weeklybiz/2024/07/04/OMG4FDW55VABTK6QVQM2NBY5CA/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 3일 도쿄 일본은행 본점에서 새로 발행한 지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새 1만엔권 지폐에는 일본 근대 경제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화가 들어가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에이이치를 취재하게 된 배경부터 간략히 들려 드립니다. 지난 3일 발행된 일본 새로운 도안의 지폐 1만엔권 주인공 에이이치는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하나이지만, 한국에선 1900년대 초 당시 일제의 대한제국 경제 침탈을 주도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일본에서 기업인이 지폐 인물로 발탁된 건 그가 처음이지만, 사실 112년 전 다른 나라 지폐에 얼굴을 올린 적 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에서 발행됐던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지폐 ‘제일은행권’이죠.

1895년 청·일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을 신호탄으로 조선에 본격적인 경제 진출을 추진하던 일본 정부는 그 기틀을 다질 인물로 에이이치를 낙점했습니다. 19~20세기 일본에서 500개 기업을 세우는 등 서양의 자본주의 제도를 안착시킨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1898년 처음 조선땅을 밟은 에이이치는 4년 뒤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1·5·10엔 제일은행권을 국내에서 발행합니다. 나아가 그는 1900·1905년 각각 경인철도합자회사와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수장으로서 경인선·경부선의 완공을 이끌었습니다.

1902년 일본 제일은행이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1·5·10엔짜리 지폐.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김동현 기자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지폐와 철도는 가장 강력한 권력으로 작동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력이 에이이치가 1910년 일제에 의해 우리 국권이 상실된 ‘경술국치’의 기틀을 다졌다는 비판을 받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일본 재무성의 신권 발행 소식이 나온 2019년 4월, 국내 언론 대부분도 그를 ‘구한말 경제수탈의 주역’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에이이치가 한반도에서 지폐, 철도를 만든 이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제일은행권이 전시된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도 “1878년 부산에 지점을 연 일본 제일은행은 1902년 대한제국 허락 없이 은행권을 발행했다. 국민들은 배척운동을 전개했으나 일본 정부 개입으로 유통을 막지 못하였다”는 두 문장만 적혀 있을 뿐이죠. 이 때문에 국내외 전문가 사이에선 에이이치가 당시 실제로 일제의 대한제국 경제 침탈을 목표했는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국중호 일본 요코하마시립대 국제상학부 교수

국중호 일본 요코하마시립대 국제상학부 교수는 “에이이치가 한반도 식민지화를 목표로 지폐를 만들고 철도를 깔았다 보는 건 결과론적이고 조금은 감정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관측”이라 했습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도 해당 주장에 대해 “과잉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했죠. 당시 일본의 한반도 경제 진출에 동행한 에이이치는 일본에서 그러했듯, 은행·철도 등 기초 사회 인프라를 구축해 조선을 부흥시키려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당시 대한제국에서의 그의 활동이 일제 식민지화의 필수적인 토대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고, 이에 책임론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에이이치의 후손들을 만나 당시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지 물어봤습니다. 시부사와가(家)가 해외 언론 인터뷰에 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에이이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는 이유로 기자의 인터뷰 요청 승낙을 주저하면서도, ‘한일 우호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응하겠다’고 답을 보내왔습니다.

시부사와가(家) 가계도/ 그래픽=김하경

그렇게 지난달 각각 만난 시부사와 마사히데, 시부사와 겐과의 인터뷰 내용을 전해드립니다.

◇에이이치 증손자 마사히데(99)

지난달 22일 방문한 에이이치의 자택은 으리으리한 단독주택에 수행원이 달린 모습을 예상한 것과 달리, 지극히 평범한 가정집이었습니다. 공동 현관 비밀번호도 없는 허름한 맨션의 30평 남짓 되는 한 호실이었죠.

-자택이 생각보다 소박하다.

“하하. 증조부에게 물려받은 집은 아니다. 그와 우리가 함께 살았던 집은 도쿄 고토구에 지금까지 국가 문화재로 남아 있다. 아버지(시부사와 게이조)가 재무대신이었던 1946년 재산세를 도입하면서 정부에 물납했다.

-적잖은 나이에도 무척 건강해 보인다.

“특별히 건강을 위해 하는 일은 없다. 선천적으로 건강한지 큰 병을 앓은 적이 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거의 병에 걸린 적이 없다. 젊을 땐 등산이나 스키 등 평범한 스포츠들을 즐겼는데 지금은 안 한다. 솔직히 그렇게 건강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에이이치에 대한 기억은.

“증조부는 내가 6살 때 돌아가셨다. ‘증조부는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사람이고, 내가 그 후손’이라는 인식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증손자인 나를 소중히 여겨줬던 것도 같다. 증조부가 돌아가신 1931년 11월 장례식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왔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평생을 에이이치 공적을 기리는 활동에 힘써 왔다.

“아버지는 생전 에이이치에 대한 전기(傳記)를 4만5000쪽, 책 68권으로 집필했다. 약 30년이 걸렸다. 나는 그 자료를 디지털화(化)해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보게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6년 직접 실현에 옮겼다. 현재도 인터넷에 공개돼 있다”

지난달 22일 일본 도쿄 미나토구에서 만난 시부사와가(家) 당주 시부사와 마사히데(99). 어린 시절 증조부인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찍은 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환하게 웃고 있다./도쿄=김동현 기자

기자는 줄곧 마사히데의 증조부인 에이이치를 ‘기업인’ ‘재계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제 말을 듣던 마사히데는 갑자기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증조부에 대해선 ‘재계인’이란 이미지가 강한데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에이이치가 자손들에게 물려준 유산은 1000만엔에 불과했다. 같은 시기 미쓰이 등 다른 재벌 가문들은 최소 5억엔씩을 물려줬다. 반면 증조부는 약 500개의 기업 설립에 관여하면서도, 다른 재벌처럼 본인 이름을 딴 회사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이를 어떻게 재계인이라고 할 수 있겠나. 나는 그가 문화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문화인’이 뭔가.

“증조부는 돈, 회사보다 일본 전체를 생각한 사람이었다. 다른 성공한 기업인들처럼 리스크가 높은 산업엔 손을 댄 적이 없다. 대신 상공회의소, 제지회사 등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일에 스스로 뛰어다니며 팀을 꾸리고 하려고 했다. 공공적인 일을 추구했단 점에서, 일본 기업 문화 전반을 다진 문화인이라는 것이다”

-신권에 대한 소식은 미리 들었나.

“2019년 일본 재무성 발표가 있기 전에, 내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증조부가 최고액 1만엔에 실린다고 하더라. 선거 같은 걸 하진 않았고, 내부 회의를 거쳐 정했다고 들었다. 좋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에이이치는 작은 나라였던 일본에 자본주의를 세우고 지금 같은 부국으로 만든 인물이니까. 또 이번이 사실상 일본 역사상 마지막 지폐가 될 것 같다는 점에서 증조부가 그 주인공이 됐다는 게 기뻤다. 지폐는 점점 필요 없어지지 않나.”

-에이이치가 지금까지 존경받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증조부는 예부터 유명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관심이 유독 커졌다. 2019년 재무성의 신권 발행 발표와, 2021년 증조부 일생을 다룬 NHK 대하드라마 ‘청천을 찔러라’ 방영 덕분이었다. 에이이치가 강조했던 경제 이념이나 사상이 현대에 와서야 말로 사람들에게 필요해진 것 아닐까. 생전 그는 자신의 부를 모으는 데엔 관심이 없고, 오직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다른 회사와 사람들을 손수 도왔다. 그 과정에서 숱한 기업과 부자들이 탄생했지만 정작 본인은 부자가 되지 못했다. 최근 들어선 자본주의 구조가 많이 날카로워지지 않았나. 이에 사람들이 증조부의 따뜻했던, 친절했던 사상에 목말라하는 것 같다. 우리도 ‘다 같이 잘 살자’라며 협동했던 시절을 말이다.”

-에이이치가 추구했던 원칙은 뭔가.

“‘합본주의’. 혼자 큰돈을 버는 건 소용이 없고, 다 같이 성공해야 나라도 부국해진다는 거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증조부는 비즈니스 매니저로서 수많은 기업을 거느리면서도 결코 그 주인이 되려고 하진 않았다. 설립에 관여하면서도 경영은 늘 적임자에게 맡겼다. 합본주의는 메이지 시대 일본에 팽배했던 ‘군국주의’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메이지 이후 일본은 다른 국가 침략에 나서는 등 나쁜 짓을 많이 하지 않았나. 그러한 상황에도 경제 관료로서, 정부에서 나온 뒤엔 경제인으로서 뚝심 있게 추구했던 합본주의가 지금의 일본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가장 큰 원칙이자 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에이이치는 사회 공헌에도 힘썼다고 들었다.

“그렇다. 증조부는 기업가로서의 활동뿐 아니라 사회 공헌에도 열정적이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재계 활동을 마친 뒤엔 사회 공헌 활동으로 평생을 현역으로 살았다. 기업은 물론 그가 남긴 공헌 단체들이 아직 현존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일본 재무성이 2019년 4월 8일 공개한 새 지폐 도안 견본. 1만엔권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화가 담겼다./재무성

-한국 경제는 어떻게 보나.

“일본 식민 지배 시절도 물론 그랬겠지만, 한국에 있어 가장 불행했던 역사는 분단이라고 생각한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한 국가가 양분되지 않았나. 일본도 물론 전후 공황 등 위기를 겪으며 성장했지만 한국의 상황이 훨씬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분단 탓에 낭비한 시간이 너무 많다.”

-한국에서 에이이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증조부에게 한반도를 지배하겠단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풍요해지길 바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당시 증조부가 조선에서 만든 지폐(제일은행권)나 철도 등은 모두 사회 인프라의 기초 아닌가. 일본도, 한반도도 다 함께 부자가 되어 번영하는 것. 그리고 외교적으로도 양국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증조부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증조부가 아무리 그런 말을 해도, 당시 일본에선 통하지 않았을 거다. 조선을 침략하려는 당시 일본 정부의 의지가 막강했고, 이를 증조부가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정책이 항상 좋은 방향으로 흘러온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다. 나도 당시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 당시의 일본은 매우 이기적인 나라였다. 이는 당시 일본이야말로 약한 나라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에이이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증조부는 분명히 조선이 일본에 점령당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세계 평화를 소중히 여겼던 그이기에. 그래서 일본이 점점 더 군국주의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슬프게 생각했던 것 같다. 특히 그는 청소년기 때부터 농민으로서 관료에게 차별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차별 없는 사회를 매우 중시했다.”

◇에이이치 고손자 겐(63)

에이이치의 장남 시부사와 도쿠지(1873~1932)의 삼남(三男)의 손자 시부사와 겐(63)은 그는 2001년 ‘시부사와 앤드 컴퍼니’를 설립해 매해 100여 곳의 국내외 기업, 경제 단체에서 고조부의 경제 사상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습니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고손자 시부사와 겐

-어쩌다 지금 일을 하게 됐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가서 쭉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미국에 갔고, 헤지펀드 회사에 취업했다. 헤지펀드의 개념을 일본 투자자들에게 소개하는 업무였다. 당시까지 일본 대부분 기관 투자자들은 헤지펀드 등 대체투자란 개념에 대해 무지했다. 투자 대상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 이름을 딴 ‘시부사와 앤드 컴퍼니’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대체투자 사업을 해보려 했다.”

“그렇게 회사를 차리고 반년 지나 미국 출장을 갔는데, 9·11 테러가 터졌다. 회사를 막 창업한 상태였고, 아들이 태어난 지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빨리 일본에 돌아가야 하는데, 비행기는 일주일가량을 뜨지 않았다. 그때 평화가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40년 인생에 처음으로 울린 ‘알람 시계’였다.

“당시 미국에선 소방대원을 포함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현지 기업들은 즉각 기금을 만들어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한 세대에 다 쓰지도 못할 정도의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과제가 생기니 자발적으로 이에 개입하는, 책임 있고 역동적인 사회를 목도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엔 그런 문화가 없었다. 그렇게 펀드업계에도 사회와의 접점을 만들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

-강연은 직접 다니나.

“그렇다. 20년쯤 전부터 시작했는데, 미국에선 리먼쇼크(2008년)가 끝날 무렵부터 시부사와에 대한 관심이 좀 더 높아진 것 같다. 이후에 일본에선 NHK 대하드라마(2021년 청천을 찔러라)도 있었고. 요새는 지폐 신권을 계기로 강연을 요청받는 일도 자주 있다. 강연 대상은 기업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단체나 상공회의소, 또 업계인들의 모임 등 다양하다. 주 2~3회쯤 다니니, 1년에 100~150개 단체 정도 된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2021년 10월 임기를 시작하며 장기 발전 계획 ‘새로운 자본주의’를 발표했습니다. ‘부자와 빈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분열을 막겠다’는 것이 골자였죠. 이때 출범한 기시다 내각의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 회의’ 위원 명단엔 겐도 포함됐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새로운 자본주의가 뭔가.

“새로운 자본주의란 게 만들어진 건, 기시다가 총리가 되기 전인 2017년이다. 그때 굉지회(자민당 기시다파)에서 강연 의뢰를 받아 ‘경영자 한 명이 아무리 대부호가 되어도 사회 다수가 빈곤에 빠지면 행복은 계속될 수 없다’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사상을 소개한 적 있다. 기시다는 은행원 출신이라 옛날부터 에이이치 사상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총리가 되면) 에이이치의 사상을 정책에 녹여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2021년 기시다가 총리가 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 회의’가 발족됐다. 난 멤버 15명 중 한 명으로서 3년 동안 참여하고 있다.”

-좀 어려운데.

“새로운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는 지금까지도 거의 모든 일본인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에이이치의 사상을 토대로 한 ‘분배 정책’이란 건데, 그럼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그렇다기보단,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추구한다고 봐야 맞다. 포용적 자본주의랄까. 해외 시장에서도 그렇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령화, 저출산 탓에 국내 시장에만 집중하는 건 의미가 없어졌다. 세계에서 (일본 기업들의) 성장을 촉진하고, 그 성장을 다시 국내로 환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이이치 경제 사상과는 무슨 관계인가.

“에이이치가 생전 추구했던 사상은 ‘논어와 주판’이지 않나. 주판이란 건 기본적으로 ‘제대로 이익을 내자’는 것. 논어는 도덕이다. 도덕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에이이치가 말했던 이 도덕이란 부분을 현대 사회적 과제에 대입한다면 새로운 자본주의와 상당히 비슷하다. 에이이치가 말했던 또 다른 사상, ‘합본주의’(공익을 전제로 한 부는 다수의 부라는 것). 일본 자본주의의 원점이 합본주의다. 새로운 자본주의라는 건 그 시대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원점이 합본주의니 그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현재 상황을 검토하고, 다시 미래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회의는 얼마나 자주 하나.

“3년 동안 총 29번 했다. 총리도 매번 참석한다. 매번 회의가 끝나면 15명 위원 한명 한명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준다. 사실 회의에서 위원들이 발언할 시간은 2~3분밖에 안 된다.”

-‘새로운 자본주의’가 어떻게 정책에 녹아드나.

“기업의 가치는 크게 눈에 보이는 재무 가치와, 보이지 않는 인적 가치로 나뉜다. 이를 에이이치의 ‘논어와 주판’으로 해석한다면 논어가 인적이고 주판이 재무 가치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논어’를 강조했던 에이이치처럼 인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선 최근 2~3년 새 기술보다 인력을 중시하는 의식이 (정부 정책과 홍보 덕분에) 굉장히 높아졌다.”

“또 일본은 2000년대 초 무렵부터 NISA(소액투자비과세제도, 주식 거래에서 발생하는 이익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제도)라는 제도를 운용 중인데 그 덕에 젊은 세대의 투자가 크게 늘었다. 이처럼 (투자에 소극적이었던 일본에서) 정부·기업의 지원뿐 아닌 새로운 돈의 흐름을 끌어내 새로운 자본주의의 효과를 넓히려 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오른쪽) 일본 총리와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 3일 도쿄 일본은행 본점에서 새로 발행한 지폐를 소개하고 있다. 새 1만엔권 지폐에는 일본 근대 경제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화가 들어가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기시다는 왜 100년 전 인물을 골랐을까.

“에이이치는 사실 일본의 위인이지만, 나에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아닌가.(까마득한 사이라는 얘기였습니다.) 딱히 물려받은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으로부터 ‘너는 에이이치의 후손이니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어서 크게 의식한 적이 없다. 그러다 마흔 살이 다 되어 처음 회사를 창업하는데 여러 가지 깨달았다. 우리에게 남긴 회사는 하나도 없지만, 엄청난 재산을 남겨줬다는 걸.(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에이이치가 주창했던 경제 사상들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질 알았단 뜻) 100년 전의 말씀이었는데도 지금 시대에도 똑같다.”

“이런 걸 느끼고 (안주해 있는) 일본 경제에 분노를 느꼈다. 일본은 앞으로 더 충분히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는데. 더 좋은 회사, 더 좋은 경영자, 더 좋은 일반 시민.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에이이치의 ‘논어와 주판’ 중 ‘주판’에 해당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주판이 ‘지속가능성’을 말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논어와 주판에 대해 좀 더 설명하자면.

“중요한 것은 ‘논어 혹은 주판’이 아닌 ‘논어와 주판’이라는 것이다. 둘 중 하나만 추구한다면 지속가능성이 없다. 이 두 사상이 합쳐져야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다. 이게 에이이치 사상의 핵심이 아니었을까. 현대 시대는 과거보다 더 도덕, 친절함 같은 가치가 사라지지 않았나. 총리는 지금 시대야말로 시부사와의 사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의 새로운 자본주의라는 경제 정책도 고조부의 사상과 싱크로율이 높다.”

“시부사와는 그 공적이 일본인들에게 인정받고 인식도 좋지만, 최근 기시다는 안타깝게도 미디어에서 무시당하고 당장 사퇴 당할 것 같은 보도밖에 없어서 안타깝다. 개인적으론 기시다가 재임 기간 한국과 글로벌사우스 등 외교적으로 새로운 노력을 보여준 것에 대해 좀 더 (긍정) 평가를 해주면 어떨까 싶다.”

-에이이치가 1만엔권에 실린 이유는 뭘까.

“고조부가 신권에 실린다고 발표가 나왔던 타이밍이 흥미로웠다. 그때(2019년)는 일본이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연호가) 바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였지 않나. 발표 전에 미리 전화를 받고 고조부가 실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어떻게 결정된 것인지 따로 재무부에 물어본 적 있다. 내부 협의회를 차렸다든지 회의를 거쳤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장관이 정했다’고 하더라. 선거 같은 것도 없었고.(당시 일본 재무상은 아소 다로 전 총리) 답변은 그렇게 들었지만 현실적으론 사무국이 몇 가지 안을 가지고 보고했을 거고, 최종적으로 장관이 결정하지 않았나 싶다. 정말 영광이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내가 주목했던 건 조합이었다. 이번에 새로 나오는 지폐는 1만엔, 5000엔, 1000엔이지 않나. 1000엔은 의학과 관련한 위인이 실리고, 5000엔엔 여권 신장으로 유명한 위인이 실린다. 그리고 1만엔은 사업가. 이는 당시 정부가 레이와 시대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3요소로 과학과 여성과 주판(경제)을 꼽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거기까지 재무부가 생각한 건진 잘 모르겠지만, 메시지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지폐는 또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으니까. 앞으로 지폐는 예술품으로 남지 않겠나.”

그래픽=김하경

-침체한 일본 경제에서 벗어나려는 메시지로도 볼 수 있을까.

“하하,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시부사와가 활약했던 시대는 개발도상국이었던 일본이 단숨에 부강해진 때다. ‘논어와 주판’이 출간된 1916년 일본은 큰 호사를 누렸다.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국가가 풍요해진 시기였다. 전쟁 특수를 통해 엄청난 돈을 번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고조부는, ‘부강해진 일본이 이대로면 위험하다. 더 지속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주판(경제)뿐 아니라 도덕, 사회 전체도 생각해야 한다’라고 본 것이다.”

“이를 현재에 투영하면, 지난 30년 동안 일본 경제는 ‘완전히 안 된다’라는 말을 많이 듣지 않았나. 난 이게 일본 시대를 관통하는 일종의 ‘파괴와 번영의 리듬’이라고 생각한다. 옛날부터 생각하면,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30년은 에도 시대의 상식이 파괴된 시기였다. 그 파괴로 인해 다음 30년, 1900년부터 1930년까진 번영했다. 그 번영 이후 전쟁이라는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파괴의 시대가 다시 나타났다. 불타는 들판이 안정되고 다시 1960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은 번영의 시대, 고도성장의 시대를 구축했다. 1980년대, 내가 20대 후반이었을 때 주변 어른들은 ‘이제 일본은 세계에서 배울 게 없다’는 식으로 말할 정도였다. 한국이나 중국 등 아시아 주변국들은 전혀 경쟁 상대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번영 이후의 30년이 찾아온 거다. 사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잃어버렸기보단, 일본이 그냥 누워버린 거다. 일본이 가난해지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번영해지면서 따라잡히고 추월당했다.”

“이런 리듬감을 생각하면, (일본 경제 침체가 시작한) 1990년부터 30년은 2020년이지 않나. 그렇다면 (2020년이 지난) 지금 세대는 다시 한 번 일본이, 이전 시대와는 다르겠지만, 새로운 풍요로움을 반영하는 시대를 구축할 가능성이 있는 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1900년대 초 일본의 번영을 이끌었던 고조부의 사상을 끌어와 그때와 같은 번영을 이루려는 목적 같다.”

-에이이치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일본 경제에 어떤 조언을 했을까.

“내가 강연에서 쓰는, 에이이치의 논어와 주판을 인용해 쓴 글이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고식적으로 기존 사업을 계승해 안주할 때가 아니다. 창업의 시대이자 모두가 큰 각오를 갖고 만난(萬難)을 무릅써 용왕매진(勇往邁進)할 때다.’ 즉 우린 쇼와 시대의 성공 경험이나 헤이세이 시대의 트라우마에 얽매이지 말고,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제창한 것처럼 레이와 시대의 새로운 ‘창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존 사업을 계승하려고만 하고, 거기에 계속 매달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정중하게 이어갈 시대가 아니다. (고조부가) 지금이라면 아마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1840~1931)

-에이이치는 어떻게 그렇게 욕심이 없을 수 있었을까.

“사실 반대라고 생각한다. 초(超)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일족의 번영이 아니라 국가의 번영을 꿈꾸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해서 딱히 본인 가족이 가난해지길 원하지도 않았을 거다. 지금 세상에도 굉장히 가족적이면서도, 사업이나 유산을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고 모두 기부한다든지 그런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고조부는 그런 쪽의 사람이었던 거다. 그리고 그 동력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맹렬한 애국심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지속 가능한 국가 번영을 위해선 자손이 아닌 더 적임자에게 본인의 역할을 맡기려 했을 것이다.”

“근데 사실 후손에게 전혀 신경을 쓸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을 거다. 손자 시부사와 게이조에겐 ‘부탁이니 은행에 들어가 달라’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든 시부사와라는 명맥을 이어받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였을 거다. 원래 그는 과학자, 연구자가 되고 싶었던 것으로 아는데 어쩔 수 없이 은행에 들어가고, 어쩔 수 없이 일본은행 총재가 되고, 어쩔 수 없이 재무장관이 되고. 그런 의미에선 불쌍한 사람이지도 않았나 싶다.(농담으로 웃으며 한 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우리 아버지는 16살이셨던 1945년 종전을 맞이하셨다. 당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은 절대 질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고 한다. 근데 일본에 탱크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장래에 이 큰 미국인들과 대등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 전쟁의 이유가 일본과 미국이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영어를 엄청나게 공부했다고 한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도쿄은행에 취업해 미국으로 발령이 났다. 1968년 뉴욕에 부임했다. 나도 그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줄곧 미국에 살았다.”

“나 같은 경우엔, 특별히 시부사와 가문이란 걸 의식한 것도 아니고. 괜히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절대 은행 같은 덴 들어가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돌아와 보니, 전혀 쓸모없는 사람인 것 아닌가. 딱히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재단법인에 취업했다. 일본국제교류센터. 거기서 2년쯤 일하다 다시 MBA를 다니러 미국에 돌아왔고. MBA를 땄더니 투자 은행에서 일본인을 환영한다는 것 아닌가. 금리도 환율도 아무것도 모르는 난데. 그래도 재단법인보단 투자은행이 월급이 더 높았으니까 투자 쪽 일을 하게 됐다.”

-에이이치가 설립한 기업과의 연은 이어지고 있나.

“제국호텔 사장이랑은 자주 본다. 다른 회사들하고도 개인적인 교류는 계속 하고 있다. 그쪽에서 연수 강연 등을 부탁해오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 국기

-한국 경제를 평가하자면.

“낮은 기반에서 단숨에 성장했단 점에서 일본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차이점은 일본은 어떤 산업에 있어서든 국내 수요가 있어서 (내수 시장 활성화만으로도 발전했는데). 한국은 국내에서만은 발전할 수 없어서 해외에 의도적으로, 전략적으로 진출해 왔다. 일본은 어떤 의미에선 국내 수요가 너무 많았던 바람에 그쪽(해외 시장)은 뒤처졌다. (일본은) 하고 있는 일을 계속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의 (안주하는) 멘탈리티 때문에 격차가 벌어진 것 같다.”

“다른 차이점은, 일본은 대기업이 눈에 띄긴 하지만 취업자의 99%는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중소기업이 사회의 탄탄한 기반으로 받쳐주고 있다는 것. 그런데 한국은 중소기업보단 재벌계 비즈니스 그룹들이 빽빽하게 있고,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적인 면에서도 한국 엄마들이 일본 엄마보다 굉장히 열성적이지 않나.”

-에이이치는 왜 조선에서 지폐를 만들었을까.

“확실한 건 고조부가 당시 조선에서 발행한 제일은행권에 본인의 얼굴을 넣으라고 지시했을린 없다는 거다. 그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에이이치가 당시 조선에서 만든) 지폐나 금융, 철도라는 것은 사회 인프라의 기반이 되는 것 아닌가. 그 30년 전인 1870년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했던 일과 같다. 은행 제도를 구축해 돈의 유통 기반을 만들고, 홋카이도 개척 철도에도 꽤 많은 투자를 했고.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한국(당시 조선)이란 도전적 사회가 앞으로 발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 그런 걸 (에이이치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것이 식민지를 목표로 했느냐 하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에이이치의 과거 사상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하늘 아래 사람을 보면 모두 다 같은 피조물이다. 사람은 모두 형제이므로 서로 친하게 지내고 서로 사랑하며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하늘에 대한 도리다. 하늘에서 보면 우리도 없고 남도 없고 국경도 없다.’

“하지만 당시 군부 사람들은 식민지 활동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넓히려 했을 것이다. 군부 입장에선 사업하는 사람들을 잘 활용하고 싶어하니, 조선에 데려가려고 했겠지만, 고조부는 당시 (조선) 사회가 필요로 한 인프라를 만들려 했을 것이다. 인프라 구축. 일본에서 새로운 시대를 위해 인프라를 구축했던 그이기에, 당시 한반도를 봤을 때 여러 가지 과제를 보았을 거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논어와 주판’을 대입해보자. 그런 생각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확실히, 조선이 일본에 지배당하는 모습을 보며 고조부는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1931년 11월 숨지기 직전 일제 지배하에 놓인 한반도와 불과 두 달 전 벌어진 만주사변을 보며 괴로워했다고 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고손자 시부사와 겐(63)

-한일관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역사라는 건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과거를 잊어버리자고 해선 안 되지만, 생물이란 것은 왜 살아있는 기간이 유한한지 생각해보면… 리셋을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세대교체. 윗세대 사람은 여러 경험을 쌓고, 앞으로 젊은 세대는 그런 것을 잊지 않으면서도 함께 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는 분노를 연료로 삼지 않나. 거기서부터 항상 (양국 관계가) 꼬여버리는 것 같은데. 일반 민간 차원에선 그런 게 없다. 당신도 도쿄에 왔을 때 수많은 한국인이 여행을 온 걸 보지 않았는가. 한국에는 수많은 일본인이 있는 것처럼.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아내도 한류 드라마를 좋아한다. 겨울연가도 좋아했고. 젊은 세대 여성들도 한류 드라마에 푹 빠져 살지 않나. 그래서 그런가 요샌 일본 남자보다 한국 남자가 더 멋지게 그려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항상 드라마에서 한국 남자는 다정다감하게 그려지니까… 농담이다.”

“그러니 뭐랄까, 양국이 좀 더 자연스럽게 교제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란 바람이다. 일본과 한국, 한글과 일본어는 전혀 다르지 않나. 그런데 세계에서 보면 지극히 똑같다. 오히려 형제에 가장 가깝지 않나. 반대로 그래서 싸우는 것 아닌가도 싶은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한일)는 형제니까, 싸우더라도 형제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긴 인터뷰 전문을 읽어주신 구독자들께 감사합니다.

'도쿄 타워'가 보이는 일본의 수도 도쿄의 전경/조선일보DB

7월10일 46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일본 1만엔 새 지폐 주인공 시부사와 에이이치 후손들이 한국에 남긴 메시지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44~45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강아지, 전라여성이 후보? 난장판 된 도쿄도지사 선거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6/26/ZV7EKNX27JDHJCM7IUIMJ24CB4/

‘세계 최대 경제권’ 도쿄도지사 선거 프리뷰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7/03/TD6ZWGESFRCB7FX4KT3TZJ4SNQ/

‘방구석 도쿄통신’은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하단의 ‘구독’ 링크를 눌러주세요. 이메일 주소로 ‘총알 배송’됩니다.

이번 한주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5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