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학·우석·태인·동환·준형을 기억하며 [전국 프리즘]
최예린 | 전국부 기자
11년 만에 고백하면, 그날 저녁 나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충남 태안에서 고등학생 다섯이 실종됐다는 뉴스를 보고도 ‘몰래 놀러 나갔겠지’ 정도로 여겼다. 몇 시간 뒤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알았을 땐 이미 만취 상태였다. 다음날 아침, 타 언론사 선배 차를 얻어 타고 태안 앞바다에 꼴찌로 도착했을 때도 ‘이게 무슨 상황인가’ 현실감이 없었다. 그날의 태안은 지역신문 신출내기 기자인 내가 처음 맞닥트린 ‘큰일’이었다.
병학이, 우석이, 태인이, 동환이, 준형이는 학교 체험활동으로 태안에 간 거였다. 학교가 체험활동 계약을 맺은 해양유스호스텔은 아이들이 참가하는 해병대캠프 운영을 여행사에 넘겼고, 여행사는 또 다른 업체에 재하청을 줬다. 캠프는 해병대와는 상관없는 ‘사설’이었다. 교관의 절반은 수상안전(인명구조요원) 자격증도 없었고, 그중엔 이제 막 군을 제대한 아르바이트생도 있었다.
2013년 7월18일 오후 4시40분, 공주사대부고 2학년 학생 80여명은 태안 해양유스호스텔 앞바다에 있었다. 아이들은 구명조끼를 입지 못한 채 해병대캠프 교관의 지시에 따라 줄을 맞춰 뒷걸음으로 바다에 들어갔다. 그 동네 주민들은 “갯골(갯가에 좁고 길게 수심이 깊어지는 곳)이 있어 위험하다”며 들어가지 않는 바다였다. 앞줄에 있던 23명이 갑자기 깊어진 수심에 놀라 서로를 붙잡고 허우적댔다. 그 모습에 뒷줄에 있던 60여명은 재빨리 백사장으로 빠져나왔다. 물에 빠진 아이들은 근처에 대기하던 보트가 와 구조했지만, 인원을 셈하니 5명이 부족했다.
다음날 아침 6시 넘어 준형이와 우석이가 숨진 채 발견됐다. 늦은 오후 동환이와 태인이도 물 밖으로 나왔다. 병학이는 같은 날 저녁 사고 지점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서 건져 올려졌다. 그날 내가 본 건 동환이와 태인이였다. 들것에 실려 나온 아이들 주변을 둘러싸고 휴대폰을 들이댄 기자들 틈에 나도 있었다. 취재 경쟁에 절대 뒤처지지 않겠단 안간힘을 무너트린 건 ‘손’이었다. 몸을 덮은 하얀 천 밖으로 빠져나온 아이 손을 보는 순간, 신입 기자의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닷새 뒤 공주사대부고 운동장에서 영결식을 하던 날 비가 많이 왔다. 그날 나는 “아이의 이름이 불리고, 짧은 생의 궤적이 읊어질 때마다 터져 나온 가족들의 울음소리는 찢어질 듯 아프게 허공을 갈랐다”고 기사를 썼다. 영결식에서도, 기사를 쓰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기사의 말미에 “이런 아픔과 서러움이 마지막이 되도록 이 나라 교육의 책임자로서 모든 힘을 쏟을 것을 약속하겠다. 우리 아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교육부 장관의 추도사를 새기며 굳이 “기자도 울었다”고 쓴 건, ‘기억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리고 9개월 뒤, 수학여행 가는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했다. 세월호 참사 다음날 밤, 우석이 부모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먼저 바다에서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어떻게 이런 일이 또 있을 수 있느냐. 무능한 정부가 또 어린 학생들을 바닷속에 사장했다. 구조 중이라는 언론의 보도는 모두 거짓이다. 기자들은 왜 지금 진실을 알리지 않는 거냐”며 절규했다. 나는 거대한 무력감에 다시 무너졌다. 다섯 아이의 죽음에 대해 쓴 기사들이 아무 쓸모도 없었다는 자책이 나를 덮쳤다. 주변에서 “해병대캠프 참사에 너무 집착한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그 이야기를 쉽게 놓지 못한 건 사실 ‘사명감’ 따위가 아니었다. 너무 하찮은 기자로서 내 쓸모를 스스로에게라도 증명하고 싶은 ‘발악’이었다.
그때처럼 해병대캠프 참사를 떠올리며 산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가끔은 생각이 스칠 때도 있다. 아들을 품고 잠이 들 때, 그 아이가 “엄마” 부르며 까르르 웃을 때, 그 모습을 보고 더없이 행복할 때, ‘그 친구들도 부모에게 이런 기쁨이었구나’ 생각하며 병학이·우석이·태인이·동환이·준형이 얼굴이 떠오른다면 믿을까. 그런 사람도 있다는 것이, 그 친구들의 부모님에게 조금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
floy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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