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내정은 우리 안보 문제”…일본 개전을 밀어붙이다
조선으로 돌아온 오토리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뜻밖에도 ‘평온한’(!) 서울 풍경이었다. 동학군은 조선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해 민란은 수습 국면에 들어섰다. 고종과 민영준이 열흘만 더 참았더라면, 조선을 망국으로 몰아간 청일전쟁이 한반도를 할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청의 파병에 맞서 조선에 대병력을 보내기로 결단한 일본은 신속히 움직였다. 조선이 3일 밤 청에 원병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무쓰 무네미쓰(1844~1897) 외무대신은 이튿날 휴가 중이던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에게 서둘러 귀임할 것을 명했다.
오토리는 5일 오후 4시45분 요코스카에서 순양함 야에야마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1개 혼성여단 8천명이라는 대병력이 움직이려면 적잖은 시간이 필요해 우선 급한 대로 배에 해군의 육전대(해병대)를 꾹꾹 눌러 태웠다. 청의 산둥반도에서 빠른 증기선을 타면 인천까지 12~13시간이면 닿을 수 있었지만, 히로시마 우지나에서 제물포까지는 40시간이 걸리는 먼 뱃길이었다. 청보다 한발 먼저 한명이라도 더 많은 병력을 상륙시켜 기선을 제압해야 했다. 야에야마는 평균 16노트의 빠른 속도로 항해해 6일 밤 고베를 거쳐 9일 오후 3시 인천에 닿았다. 오토리가 이끌고 온 육전대 420명이 서울을 향해 출발한 것은 10일 새벽 4시였다. 전날 큰비가 내려 인천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육로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의 입성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청 역시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훙장(이홍장) 북양대신은 4일 총리아문에 “(북양함대를 이끄는) 딩루창(정여창)에게 제원·양위 두 척의 군함으로 인천·한성에 가서 화상(華商)을 보호하게 했고, 직례제독 예즈차오(섭지초)에게 태원진총병 녜스청(섭사성)을 거느리고 회군 정예병 1500명을 뽑아” 출발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왕펑짜오(왕봉조) 주일본 청국공사는 사흘 뒤인 7일 무쓰에게 “속방을 보호하는 전례(保護屬邦舊例)”에 따라 조선에 출병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무쓰는 즉각 회신을 보내 “제국정부는 조선이 귀국의 속방임을 인정한 적이 없다”고 날카롭게 반응했다. 섭지초는 9일 새벽, 섭사성은 11일 각각 아산에 상륙했다.
눈썹을 휘날리며 조선으로 돌아온 오토리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뜻밖에도 ‘평온한’(!) 서울 풍경이었다. 오토리가 서울에 도착한 10일 동학군은 조선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해 민란은 수습 국면에 들어섰다. 고종과 민영준이 열흘만 더 참았더라면, 조선을 망국으로 몰아간 청일전쟁이 한반도를 할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종은 그때야 “청국 군대가 나와 일·청 조약(톈진조약)은 자연히 깨졌다. 앞으로는 외국 군대가 어려움 없이 한성에 들어오게 됐으니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현장의 오토리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사태가 수습된 이상 일본이 병력을 추가로 보낼 명분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11일 오전 11시55분 도쿄의 무쓰에게 보낸 짤막한 영문 전문은 일본외교문서 제27권 2책 183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京城(서울) is quiet. Do not dispatch the remaining battallions until further telegram.”(경성은 조용하다. 다음 전문이 있을 때까지 대대의 남은 병력을 파견하지 말라.)
이 전문을 받아 든 무쓰는 조선 파병의 ‘전략적 의도’를 꿰뚫지 못한 오토리의 순진무구함에 분노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번 사태는 일본이 1882년 임오군란 때부터 시름 해온 ‘조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정한 태도로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던 무쓰는 청일전쟁의 전 과정(동학농민혁명~삼국간섭)을 기술한 회고록(‘건건록’)에서 “파병은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은 형상이 돼 중도에 병력의 수를 변경할 수 없었다”며 “만약 (청과) 위기일발의 상황에 다다르게 되면 그때의 성패는 병력의 우열에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적었다.
호전적인 무쓰와 달리 이토 히로부미 총리는 아직 청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13일 오전 임시 각의를 열어 청·일이 협력해 “신속히 반란을 진압”하고, 이후 “양국이 약간 명의 상설위원을 둬”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한다는 안을 제출했다. 청의 ‘압도적 우위’가 이어져 온 조선 내의 힘의 균형을 일단 50 대 50으로 맞추겠다는 구상이었다. 청이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두 나라는 전쟁을 벌이는 대신 함께 손잡고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시도하게 됐을지 모른다.
회의에서 각료들의 대체적인 동의를 끌어낸 이토는 바로 그날 왕봉조와 접촉했다. 이날 합의 내용은 왕봉조가 자신의 상사인 이홍장에게 보고한 전문(‘이홍장전집 2권’ 701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토는 난이 수습되면 철병한 뒤 협의하기로 양해하고 그 뜻을 (이홍장에게) 전해주길 당부했다.” 일단 난을 진압한 뒤 양쪽 모두 병력을 철수한 상태에서 향후 대책을 논의하자는 상식적인 ‘타협안’이었다. 일본이 이 입장을 유지했다면,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
한반도 운명을 가르는 이 중차대한 ‘역사의 갈림길’에서 면도날 무쓰가 개입했다. 그는 15일 다시 열린 각의에서 이토가 제시한 청·일 공동 개혁안에 “청과 협의를 시작해 그 결국을 볼 때까지 목하 조선땅(韓地)에 파견된 군대는 철수시키지 않는다”, “청이 우리 의견에 찬동하지 않을 때는 제국 정부가 독력으로 조선이 정치 개혁을 하도록 노력한다”는 두 가지 내용을 추가할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청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일본은 “최후의 결심”을 하고 청을 배제한 채 혼자 힘으로 조선을 개혁을 시도하겠다는 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제안이었다. 이튿날인 16일 오후 8시 무쓰-왕봉조의 회담이 시작됐다. 다음날 새벽 1시에 마무리되는 이 마라톤회담의 기록은 일본외교문서 27권 2책 208~212쪽에 담겨 있다. 왕봉조가 말했다.
“우리는 조선의 의뢰를 받아 출병했다. 다시 귀국의 군대와 함께 초적(草敵·동학군)을 평정하려고 하는 것은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 같다.”
“(어쨌든) 지금 상의하고 싶은 것은 조선 내란을 평정한 뒤 양국 정부에서 가령 3명의 상설위원을 선출해 친히 그 정부의 내정을 조사시키고 개혁을 시행하는 것이다.”
“조선 내란이 진정되고 양국이 함께 철병한 뒤 서서히 강구해야 한다.”
“우리는 평화를 회복했다는 조선 정부의 말만으로 철병하긴 어렵다.”
절대 철병할 수 없다는 무쓰의 강경한 주장을 넘지 못하고 회담은 결렬됐다. 무쓰는 닷새 뒤인 21일엔 현장의 오토리에게 보낸 전문에서 “현 시점에 이르러 양국의 충돌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믿어진다. 충돌이 생길 경우엔 꼭 조선 국왕 및 그 정부를 계속 우리 쪽으로 붙들어 두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감언이설로 그들을 유인하고 혹은 엄히 담판 지어 그들을 위협하는 등 모든 것을 각하의 뜻에 맡긴다”고 지시했다.
청의 공식적인 거절 회신이 도착한 것은 22일이었다. 왕봉조는 조선의 변란은 이미 평정됐으니 양국이 공동으로 초멸할 필요가 없고, 일본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했으니 내정에 간여할 권리가 없으며, 1885년 조약에 따라 변란이 진정되면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에 대한 무쓰의 반박문이 전달된 것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무쓰는 “조선국에 대한 제국의 이해는 심히 긴요중대해 그 나라의 참정비황(慘情悲況)을 수수방관할 수 없다”며 “정세가 이렇게 되어 가는데 제국 정부가 이를 돌아보지 않으면 조선에 대한 교의의 우정에 어긋날 뿐 아니라 우리 나라의 자위의 길(自衛ノ道)에도 위배된다는 책망을 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내정 개혁은 곧 일본의 자위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기적의 논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한 문장으로 무쓰는 “사건이 진정되면 곧 철수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는 지난 10년간 청·일이 지켜온 톈진조약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이홍장은 “조선이 비록 우둔하고 나약하지만 어찌 일본이 개혁을 시도하려 하는지 정말 가증스럽다”고 반응했고, 원로 대신 김병시(1832~1898)는 “갑자기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정치 개혁에 대한 몇 개 조항을 기록해 가지고 오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한탄했다. 하지만 호소가 군대를 몰아낼 순 없는 법이었다. 일본은 이후 개전의 명분을 얻기 위해 조선을 향해 비상식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다. 분노한 김병시는 7월11일 고종 앞에서 “모두 그들의 말에 따라야 합니까, 만약 따르지 않으면 또 군대의 힘으로 위협할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김병시는 설마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겠지만, 일본은 며칠 뒤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길윤형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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