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랐다”…‘발암물질 범벅’ 원피스 입은 여인, 어쩌다 이런 일이
연백색 안료의 치명적 비밀
아름다운 인어의 속사정 등
#1. 눈을 크게 뜬 여인이 가만히 선 채 앞을 보고 있다. 붉은색의 긴 머리카락, 진한 눈썹과 도톰한 입술, 무엇보다도 웨딩드레스 같은 원피스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옷과 커튼, 여인의 쥔 꽃 등 쌓인 눈처럼 포실해보이는 연백색이 화폭을 가득 채운다. 고요하고 잔잔한 느낌만이 마음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화가 제임스 휘슬러(James Whistler·1834~1903)의 〈흰색 교향곡 1번 : 흰옷을 입은 소녀〉다.
사연 없는 그림은 없다는 말처럼, 휘슬러의 이 작품 또한 그만의 남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장르는 로맨스, 아울러 의외로 공포 내지 스릴러도 함께 들어간다. 그녀 이름은 조안나 히퍼넌. 1843년생인 그녀는 어릴 적부터 이른바 ‘감자 기근(아일랜드 대기근)’을 겪고 런던으로 피신 온 여인이었다. 어두운 머리색, 이와 대조되는 밝은 눈동자와 피부색 등 아일랜드인의 특징을 모두 간직한 여성이었다. 환한 외모 덕에 주목받는 모델이 된 히퍼넌은 1860년께 휘슬러와 처음 마주했다. 히퍼넌은 열일곱 살, 휘슬러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둘은 곧장 사랑에 빠졌다. 히퍼넌은 그의 말쑥한 인상과 까다로운 취향, 휘슬러는 그녀의 화사한 얼굴과 유별난 붙임성을 좋아했다. 둘에게 1861년 겨울은 잊을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히퍼넌과 휘슬러는 예술의 땅, 프랑스 파리에서 선선한 공기를 만끽했다. 히퍼넌은 많은 순간 수줍게 웃었다. 자기 피부색만큼 새하얀 원피스를 입곤 종종 노래를 흥얼거렸다. 휘슬러는 그런 그녀를 요정 보듯 바라보곤 하다가, 이내 붓을 쥐었다. ‘눈 위를 걷는 사슴’ 같은 그녀를 표현하기 위해 흰색 안료를 가득 챙겼다. 그렇게 이들은 그 시절부터 그림 한 점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게 〈흰색 교향곡 1번 : 흰옷을 입은 소녀〉였다. 이렇게만 보면 둘 사이에는 오직 로맨스밖에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장르가 공포 내지 스릴러로 바뀌는 건 의외로 여기서부터다.
휘슬러가 히퍼넌을 화폭에 옮겨 담기 위해 잔뜩 펴바른 연백색 안료. 이게 문제였다. 그 안에는 당시로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게 섞여있었다. 중금속 납(Pb)이었다. 이를 들이마시는 인간에게 두통, 빈혈, 경련, 관절염 등을 안기는 성분이었다. 몸에 가득 쌓이면 암과 전신마비, 정신 장애까지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이었다. 은처럼 빛나기에 ‘실버 화이트’(silver white), 작은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기에 ‘플레이크 화이트’(flake white) 등 아름다운 별명이 붙은 이 색이, 알고보면 악마의 안료였던 셈이다.
휘슬러는 그것도 모른 채 히퍼넌과 함께 〈흰색 교향곡 2번 : 흰색 옷을 입은 작은 소녀〉, 나아가 〈흰색 교향곡 3번〉을 연달아 그렸다. 연백색이 잔뜩 칠해진 이 그림들은 눈 속에서 건져 올린 듯 청초해보인다. 하지만 휘슬러는 이 그림들, 정확히는 이 작품들에 칠해진 납 탓에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납이 쌓여가는 몸은 점점 더 약해졌다. 신경계에도 영향을 주는 납 때문에 성격 또한 더욱 고약해졌다.
잘생긴 남녀, 지적인 남성과 사랑스러운 여성. 그렇기에 더욱 어울렸던 두 사람은 원래 헤어질 일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 둘의 관계는 〈흰색 교향곡〉 시리즈, 즉 알고 보면 ‘무서운 그림들’ 틈에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휘슬러 어머니의 격렬한 교제 반대, 휘슬러와 히퍼넌 사이 이른바 ‘메기남(귀스타브 쿠르베)’의 등장이 기름을 부었다. 점점 불안정해지는 휘슬러, 그러한 연인과 새롭게 알게 된 남성 사이에 놓인 히퍼넌의 끝은 결국 어땠을까. 이들 사이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2. 나체의 여인이 모래사장 위에 선 벌거벗은 아이를 바라본다. 물에서 방금 나온 듯 등과 어깨에서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그녀는, 천천히 다가오는 아이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그림에선 그녀의 독특한 하반신이 눈길을 끈다. 두 다리 대신 은색 비늘의 지느러미가 달려있다. 이는 그녀 정체가 사람이 아닌 ‘인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녀를 향해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아이는 쑥스럽게 웃고 있다. 같이 노래를 부르며 첨벙첨벙 뛰어놀 생각, 어쩌면 미지의 바닷속 세계를 구경할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뜻 보면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한 그림이다. 존 콜리어(John Collier·1901~1980)의 〈육지의 아이〉다.
그런데, 이 그림도 시선에 따라선 ‘소름 돋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인어가 갖고 있는 불편한 진실 탓이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인어공주〉에서 인어 에리얼을 순수한 요정으로 등장시켰다. 하지만 이 동화가 등장하기 전 인어는 외려 잔혹한 괴물에 가깝게 표현될 때가 많았다. 인어의 원형은 세이렌이라는 게 정설로 통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모습을 보이는 세이렌은 지중해에 사는 반인반조의 괴물 새다.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의 혼을 쏙 빼놓은 후, 곧 송곳니와 발톱을 드러내 이들을 뜯어먹으면서 사는 존재였다.
이들은 미지의 존재이기에 외려 신비로워진 걸까. 세이렌에 대한 묘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바뀌었다. 가령 더 매력적 얼굴, 고혹적 몸매를 갖추고 있다는 설 내지 주장이 거듭 쌓였다. 그런가 하면 바닷가 한가운데 산다는 설정 때문인지, 세이렌은 차츰 새의 몸통이 아닌 반인반어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렇게 인어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만, 그래도 달콤한 목소리로 인간을 홀려 죽여버린다는 ‘고약한 버릇’은 그대로 유지됐다. 그리스 로마 신화 말고도 영국, 독일, 아일랜드 등 여러 나라가 과거부터 인어를 불길한 존재로 치부했다. 녀석이 보이면 배가 곧 박살난다거나, 폭풍우가 몰아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괴물 세이렌의 후손 격인 인어가 품은 뒷배경을 알고 〈육지의 아이〉를 보면 그림이 어떤가. 그러고 보면 인어는 아이에게 귀여움 등의 감정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아이의 모습이 특이하다. 아이는 인어에게 ‘홀린 듯’ 눈에 초점이 없다. 다가오는 자세 또한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이건 인어와 아이가 같이 있는 훈훈한 모습이 아니라, 한쪽이 한쪽을 납치하고 있는 섬뜩한 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헤럴드경제 기자인 저자의 책 ‘무서운 그림들’은 단순히 보기에 무섭기만 한 그림을 소개하지 않는다. 위 사례처럼 이토록 절절한 사연을 품고 있기에, 이렇게나 강렬한 역사와 신화 등을 품고 있기에 더욱 ‘무서워지는’ 작품을 알려준다. “‘무서움’이란 감정이 이토록 다채롭고 입체적이고 매혹적일 수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출판사의 평이다.
저자는 이번 책을 통해 19명의 화가, 100점의 명화를 짚는다. 이 중에는 렘브란트 판레인의 〈야경〉과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 등 유명한 예술가와 명화도 있다. 아울러 한스 홀바인의 〈헨리 8세〉와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등 비교적 덜 알려진 예술가와 명작의 ‘무서운 속사정’도 촘촘하게 소개한다. “어느새 역사, 종교, 신화, 고전의 교양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출판사 설명처럼 시기와 시대를 초월한 인문학적 즐거움까지 느낄 수 있다.
책은 장편 미술 연재물의 ‘원조 맛집’으로 꼽히는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의 방식을 따른다. 여러 차례 다듬은 원고, 아울러 이번에는 연재 루틴 상 온라인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미공개 특별 에피소드 또한 10편이나 만날 수 있다. 가령 저자는 ▷요아킴 브테바엘 ▷귀스타브 도레 ▷펠릭스 누스바움 등 한국에선 각 잡고 다뤄진 적이 거의 없는 개성만점 예술가를 특유의 감성으로 다뤘다. 이들이 어떤 면에서 무서운 작품을 탄생시켰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한다.
독자는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아주 강렬한, 그러면서도 아주 애틋한 그림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저자의 해설을 보면 이 절절한 작품부터 평생 마음에 안고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다음 예술가와 그림을 향해 책을 탐험하게 될 것이다. “절박한 사랑의 순간과 삶의 자세, 한 번 알면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신화와 역사, 이런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싶은 기상천외한 상상과 환상의 이야기가 (무서운 그림들에)숨어있다. (…) 교양을 가장 강렬한 경험으로 다질 수 있는 교과서가 무서운 그림이다.”
ygmo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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