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련 햄릿’ 이봉련 “제 인생에 연극 ‘햄릿’ 만난 건 천운”

이강은 2024. 7. 9.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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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 ‘햄릿’, 코로나 사태로 3년 8개월 만에 무대서 관객과 만나
햄릿을 왕자가 아닌 공주로 설정, 원작과 다른 햄릿 모습 눈길
명동예술극장서 29일까지 공연
국립극단은 창단 70주년(2020년)을 앞둔 2019년, 관객들에게 ‘국립극단에서 가장 보고 싶은 연극’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첫 작품인 ‘햄릿’이 2위였다. 국립극단은 70주년 기념작 중 하나로 ‘햄릿’을 올리기로 하고 연출가 부새롬(윤색·연출)과 극작가 정진새(각색)에게 맡겼다. 관객들이 ‘햄릿’을 택한 건 지금 시대에 맞는 햄릿을 보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한 두 사람은 어떤 햄릿을 만들어야 할지 머리를 싸맸다. 결국 익숙한 왕자 햄릿이 아닌 생소한 공주 햄릿을 내놓았다. 주인공 햄릿을 비롯해 ‘햄릿’ 등장인물(캐릭터) 일부의 성별을 바꾸고 그에 맞춰 내용도 새로 손질한 젠더 벤딩(Gender Bending) 작품이다. 햄릿으론 무대와 드라마, 영화에서 배역 비중과 상관없이 인상적인 존재감을 남긴 연기파 배우 이봉련(43)이 낙점됐다.
국립극단 연극 ‘햄릿’에서 햄릿 공주로 열연하는 배우 이봉련. 연합뉴스
그렇게 ‘햄릿’은 이듬해 제작됐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져 관객을 만나지 못하다 2021년 국립극단 온란인 극장을 통해 공개됐다. 그럼에도 평단과 관객의 호평이 이어졌고, 재공연 요청에 따라 3년 8개월 만인 지난 5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으로 2021년 백상연기대상 연극 부문 여자 연기상까지 받은 이봉련은 “제 인생에 ‘햄릿’을 만나게 된 건 천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8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국립극단 ‘햄릿’ 기자 간담회에서다. “여성 배우에게 햄릿이란 역할이 올 거라고 흔히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저를 햄릿으로 세운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면에서 저에게 ‘햄릿’은 햄릿은 어때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저의 편견을 발견하고, 그 편견을 깨는 과정이었습니다. ‘햄릿은 이래야 한다’, ‘주인공은 어때야 한다’ 편견을 계속 깨 나가는 작업이었죠.”

부새롬 연출은 “(이봉련이) 연기를 너무 잘해서 캐스팅했다. 정말 그것 하나였다”며 “체구가 작아 맞으면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인데 버티고 싸우려고 하는 느낌이 나는 배우다.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 잘해주고 있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연극 ‘햄릿’ 연출을 맡은 부새롬 연출가. 뉴시스
그만큼 국립극단 ‘햄릿’에서 이봉련의 무게감은 상당하다. ‘봉련 햄릿’이라 불릴 만큼 색다른 햄릿으 보여준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복수에 혈안이면서도 우유부단한 원작 속 햄릿과 달리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는 동시에 왕권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이봉련은 “‘봉련 햄릿’이라고 해주니 감사하다.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다(웃음)”며 “햄릿 자신이 생각한 정의 실현을 하려다 (권력 획득을 위한) 더 큰 욕망에 잠식당하고 잘못된 길에 들어 죽음을 맞는 지점을 찾아가고(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부새롬 연출은 젠더 프리(배역의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등장인물에 어울리는 배우가 출연하는 것)방식 대신 젠더 벤딩을 택한 이유에 대해 “배우에게 연기에 대한 디렉션(지도)을 하려면 저만의 상이 그려져야 하는데, 왕자 햄릿을 연기하는 여성 배우가 그려지지 않았다”며 “공주로 바꿔도 이야기가 충분히 된다고 생각했고, 그게 더 흥미롭게 보여 정진새 작가에게 제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극 중 햄릿 공주는 검투에 능한 해군 장교 출신으로 죽은 선왕(아버지) 자리를 차지한 숙부(클로디어스)의 다음 왕위 계승자이다. 햄릿의 연인 ‘오필리어’는 남성으로, ‘호레이쇼’, ‘길덴스턴’ 등 가까운 인물 일부는 여성으로 바뀌었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원작과 다르지 않지만 400여년 전 기독교적 세계관 등 중세 시대에 어울리는 대사와 당시 만연한 여성 비하나 혐오가 담긴 표현은 들어내거나 현대에 맞는 문장으로 다듬었다. 선왕의 죽음 등 주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조사위원회가 권력의 입맛에 맞는 조사결과만 내놓는 장면에선 우리 사회의 단면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연극 ‘햄릿’을 각색한 정진새 극작가. 뉴시스
정진새 작가는 “원작에선 햄릿이 어떤 왕이 되고자 하는지가 안 나온다. 우리가 햄릿을 통해 보고 싶은 건 진실이 통용되고 누구도 (억울하게) 죽지 않는 안전한 국가”라며 “공주 햄릿이 정의를 위해 권력을 잡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에 관객들도 공감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봉련과 함께 김수현(클로디어스 역), 김용준(폴로니어스 역), 성여진(거트루드 역), 류원준(오필리어 역), 안창현(레어티즈 역), 신정원(오즈릭 역), 김유민(호레이쇼 역), 김별(마셀러스 역), 김정화(버나도 역), 이승헌(로젠크란츠 역), 허이레(길덴스텐 역), 노기용(레날도 역) 등이 출연한다. 29일까지 공연.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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