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정책서 ‘임신중지 불허’ 뺐다… ‘트럼프 정당’ 확인된 미국 공화당
반이민·보호무역 공약 최우선 강조
“동맹에 공동 방위 투자 의무 부과”
미국 공화당의 새 정강정책에서 임신중지(낙태)가 미국 어디에서도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전통적 입장이 빠졌다.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공약이 수십 년간 유지돼 온 보수 정당의 이념마저 바꾼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 장악력이 확인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쉽고 간결하고 분명하게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산하 정강정책위원회는 8일(현지 시간) 20개 원칙을 담은 16쪽 분량의 ‘2024 공화당 정강정책’을 채택했다. 트럼프 캠프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인 크리스 라시비타와 수지 와일스는 보도자료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Make America Great Again)는 트럼프의 비전을 모든 유권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분명하게 표현했다”고 밝혔다.
원칙들은 ‘미국 우선주의: 상식으로의 복귀’라는 제목의 서문에 요약됐다. △국경 봉쇄와 이주민 침입 차단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 추방 실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종료 △미국을 가장 지배적인 에너지 생산국으로 만들기 △미국의 제조 초강대국 전환 △노동자를 위한 대규모 감세와 팁 면세 등이 상위 목표로 꼽혔다. ‘국가 통합’은 맨 마지막인 20번째 약속으로 포함됐다.
미국 언론은 임신중지 부분에 특히 주목했다. 연방 차원 임신중지 금지를 지지한다는 기존 정강정책 표현이 40년 만에 삭제됐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이는 ‘정당한 절차 없이 누구도 생명이나 자유가 부정돼서는 안 되며, 각 주(州)는 이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을 통과시킬 자유가 있다’는 문구로 대체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 공약이 반영된 것이다. 피임과 체외인공수정(IVF·시험관 아기) 지지도 트럼프 공약대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공화당의 11월 선거 승리가 피임과 불임 치료 단속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민주당의 경고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반(反)이민과 인플레이션 종식이 강조된 것도 트럼프 전 대통령 선거 전략이 토대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 조 바이든 대통령을 상대로 가장 큰 우위를 보이는 분야가 국경 정책과 경제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공화당 비전 설명보다 철저히 대선 승리에 맞춰 강령이 조정된 듯하다”고 분석했다.
한반도 직접 언급 없어
이번 공화당 정강정책은 사실상 트럼프 전 대통령 작품이다. 내용 면에서는 이민 통제와 더불어 보호 무역이 대표적이다. “공화당은 외국산 제품에 대한 기본(보편) 관세를 지지하며 트럼프 상호 무역법을 처리하고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할 것”이라는 대목은 고스란히 ‘미국 우선’을 표방한 트럼프 경제 공약이다. NYT는 “2024년 정강은 2020년 대선 때 재활용된 2016년 공화당 정강보다 더 민족주의적, 보호주의적이고 사회적으로는 덜 보수적”이라며 “트럼프가 공화당을 이념적으로 장악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중국의 최혜국 대우 철회, 전기차 의무화 취소 등은 전통적 공화당 지지층에도 인기 있는 정책이라고 WSJ는 짚었다. 북한 등 한반도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동맹국이 공동 방위 투자 의무를 이행하게 한다”는 내용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의 미래와 무관하지 않다.
형식적으로도 대중을 파고드는 ‘트럼프 스타일’이다. 서문의 핵심인 20개 원칙을 대문자로만 표기한 것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트루스소셜에 글을 올릴 때 즐겨 쓰는 방식이다. 길이를 2016년 정강의 4분의 1로 줄인 것 역시 실용적 선택이다. WSJ는 “세부 내용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내부 갈등을 차단하려는 심산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번 정강의 초안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광범하게 작성하고 편집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해당 문건은 15~18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리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추인될 예정이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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