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의 중요성을 망각한 한국 축구, A대표팀 미래에 희생 강요된 K리그
대한축구협회 입장에서는 어쩌면 가장 안전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한국 축구 전체로 보면, 몇 십년을 뒷걸음 치게 만든 결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5개월의 대표팀 사령탑 공백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대표팀은 결국 ‘풀뿌리’인 프로축구 K리그를 외면하는 결정을 내렸다.
홍명보 울산 HD 감독에게 한국 축구대표팀 지휘봉을 맡긴 결정은 한국 축구를 가장 잘 아는 사령탑 선임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한국 축구가 그동안 강조해온 방향성과 같은 길로 보기는 어렵다.
축구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탄탄한 자국 리그를 기반으로 한다. 2024 유럽축구선수권에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스타 군단’ 잉글랜드 대표팀은 현재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모태로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한다. 스페인(프리메라리가), 독일(분데스리가), 프랑스(리그1) 등 유럽의 최상위 팀들도 ‘유럽 빅리그’라 불리는 톱레벨의 리그를 운영 중이다. 최근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일본 역시 인기는 예전같지 않지만 철저한 시스템 하에서 관리되는 J리그를 근간으로 한다.
그런데 축구협회는 시즌이 한창인 가운데 우승 경쟁 클럽의 감독을 빼오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 축구 레전드 홍 감독은 현재 K리그1의 최고 스타 감독이다. 울산은 선두를 경쟁하며 리그 3연패를 노리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맞았다.
지금도 축구 발전에 있어 “대표팀의 월드컵(또는 아시안컵) 성적이 중요하다”는 축구인들의 ‘올드’한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든 결정이다. 올해 아시아축구연맹(AFC) 카타르 아시안컵 부진, 2024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 좌절 등 악재 속에서도 경기장을 찾는 발걸음이 줄지 않는 역대급 K리그 흥행 무드 속에 벌어진 일이다.
홍 감독의 최종 선택과 울산의 양보로 퍼즐이 맞춰진 홍 감독 체제 대표팀 출범은 대표팀을 위해 리그와 팬들의 희생을 담보로 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협회부터 자국리그를 무시하는데 한국 축구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나”, “5개월간 감독 선임을 위해 일한 결과가 ‘K리그 감독 빼오기’라니”, “시즌 중에 감독을 빼가는 노매너 축협” 등 K리그 팬들의 불만은 폭주한다.
그간 한국 축구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할 축구협회가 ‘장사가 되는’ A대표팀에 너무 많은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다. 이번 결정으로 모처럼의 관중몰이에 신난 프로축구에도 ‘악수’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K리그 감독 빼가기’ 논란이 뜨거워지면서 ‘감독으로 선임된 자가 구단에 속해 있을 경우 당해 구단의 장에게 이를 통보하고, 소속 구단의 장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해야 한다’고 명시된 축구국가대표팀 운영규정 제12조 조항도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본 언론도 홍 감독 부임 소식을 전하며 “세계에서도 드문 규정”이라고 했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구단과 팬에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건 프로가 아니지 않나. 선진리그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라며 “시대가 달라진 만큼 축구협회와 연맹에서도 향후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새로운 기준과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정호 기자 alp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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