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 트로피’가 된 주방 수전···프리즈가 선택한 작가 최고은
지갤러리에서 수전을 잘라 만든 ‘트로피’ 선보여
버려진 가전·산업용 자재를 해체·재구성
“물질들의 복잡한 생태계” 그려내
하얀 벽에 걸린 뿔 모양의 금속 파이프. 갈라서 펼친 파이프가 위로 유려하게 휘어지며 곡선을 이룬다. 매끈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헌팅 트로피’다.
이 파이프의 정체는 바로 수전. 최고은 작가는 수전의 가운데를 가르고, 휘어서 새로운 조각으로 탄생시켰다.
오는 9월 열리는 국제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의 제2회 아티스트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된 최고은 작가의 작품을 서울시 강남구 지갤러리의 ‘Whimsical Whitespace’에서 만날 수 있다.
최고은은 그동안 냉장고와 에어컨 등 버려진 가전제품과 가구 등을 자르고 해체해 조각으로 만들어왔다. 프리즈 서울이 수상작으로 선정한 ‘화이트 홈 월: 웰컴’(white Home Wall: welcome)은 버려진 에어컨을 잘라 얻은 흰색 철판들을 이어 붙여 만들었고, ‘글로리아’(Gloria)는 수도 파이프를 자르고 휘어서 만들었다.
지갤러리에서 선보이고 있는 ‘트로피’ 시리즈는 ‘글로리아’와 마찬가지로 수전으로 쓰는 금속 파이프를 이용해 사냥감을 박제해 전시하는 헌팅 트로피처럼 만든 작품들이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벽면에 있는 배관 파이프를 보게 됐어요. 파이프 라인의 흐름을 눈이 저절로 따라가더라고요. 선적인 요소가 지닌 수다스럽고 표현적인 면에 끌렸어요. 벽 속에 숨은 배관을 밖으로 꺼내 끝부분을 가르고 벌려 위트 있게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지난달 26일 지갤러리에서 최고은 작가가 말했다.
전시장 벽면에 걸린 ‘트로피’들은 제각각 갈라진 각도와 휘어진 곡선의 모양과 방향이 달라 같은 재료를 다양하게 변주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산업화된 사회의 효율성을 상징하는 규격화된 자재가 최고은의 손에서 잘리고 휘어지고 재형성되며 새로운 맥락과 의미를 갖게 된다.
‘트로피’ 시리즈가 헌팅 트로피와 같이 벽면에 걸 작은 사이즈라면,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 수상작으로 선정된 ‘화이트 홈 월: 웰컴’과 ‘글로리아’는 대형 설치작품이다. 프리즈 서울은 최고은에 대해 “폐기된 산업 재료를 변형해 대규모 설치 작품을 제작한다”며 “재료들은 작품으로 재탄생함으로써 거대한 디지털 세상 이면에 숨겨진 사회 기반시설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도시 환경에 스며들어 있는 물질들의 복잡한 생태계를 떠올리게 한다”고 밝혔다.
지갤러리에선 문이삭, 현정윤 작가의 조각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문이삭은 인왕산·북한산·북악산의 흙, 한강의 부유물 등을 재료를 반죽하고 형태를 만들어 고온의 가마에서 구워 작품을 만든다. 한강의 부유물로 한강의 빛을 표현한 ‘윤슬’이 인상적이다. 문이삭은 “한강의 부유물 태워 만든 재로 유약을 만들어 빛의 반짝임을 표현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검은색 조각들엔 푸른 무늬가 어룽져 있는데, 버려진 유리조각이 고온의 가마에서 녹아서 만들어진 흔적들이다.
현정윤 작가는 신체의 장기 일부처럼 보이는 실리콘 조각을 선보인다. 물컹한 분홍빛의 실리콘 조각은 목욕탕 의자나 비치체어에 능청스럽게 놓여 있다. 마치 살아서 의지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조각들은 관객에게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전시는 7월20일까지 열린다.
한편 프리즈 서울은 최고은의 신작을 오는 9월4일부터 7일까지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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