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유명 극작가·연출가, ‘테러리즘 정당화’ 징역 6년···“예술 탄압 본격화”

선명수 기자 2024. 7. 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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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군사법원에서 선고 공판이 열리기 전 ‘테러리즘 정당화’ 혐의로 기소된 극작가 스베틀라나 페트리추크(왼쪽)와 연출가 예브게냐 베르코비치가 유리 철창 안에 대기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러시아에서 테러단체를 소재로 한 연극을 무대에 올린 유명 극작가와 연출가에게 중형이 선고돼 논란이 일고 있다. 이들은 테러단체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공연했는데, ‘테러를 정당화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결국 실형이 선고된 것이다. 러시아 당국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반전 여론을 통제하는 한편 표현의 자유 및 문화예술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러시아 군사법원은 8일(현지시간) 비공개 재판에서 테러리즘 정당화 혐의로 기소된 극작가 스베틀라나 페트리추크(44)와 연출가 예브게냐 베르코비치(39)에게 각각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이들은 연극 <용감한 매 피니스트>의 극본을 쓰고 연출한 이들로, 지난해 5월 구속돼 재판을 받아 왔다.

2020년 초연된 이 연극은 동명의 고전 동화를 각색한 것으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 조직원들과 결혼해 IS에 합류한 옛 소련권 국가 출신 여성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연극의 주인공은 자신을 유혹한 IS 대원에게 환멸과 배신감을 느낀 뒤 러시아로 되돌아오지만, 결국 테러리스트로 지목돼 수감된다. 극단주의자들의 기만과 타락, 이로 인해 파괴되는 타인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검찰은 피고인들이 IS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과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테러리즘을 옹호하는 선전을 했다고 주장했다. 연극이 IS에 모집된 여성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고도 주장했다.

피고인들은 해당 연극이 명백히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반박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스크바 문학축제 예술감독을 지낸 러시아 극작가 미하일 두르넨코프는“<전쟁과 평화>를 쓴 톨스토이가 ‘전쟁 선동 혐의’로 재판을 받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러시아 예술계에선 과거 정부기관으로부터 제작비 지원을 받는 등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작품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급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탄압받게 됐다는 말이 나왔다.

해당 연극은 2020년 초연한 후 러시아 최고 권위 연극상인 ‘골든마스크’ 상을 두 차례 수상했는데, 골든마스크 상은 러시아 문화부와 모스크바시에서 후원한다. 정식 무대에 올리기 전에는 2019년 시베리아 톰스크지역 여성 교도소의 초청을 받아 소년원 안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이렇듯 과거에는 당국이 문제 삼지 않았던 연극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친크렘린 성향의 한 배우가 “반전 자유주의자가 연출한 작품” “우크라이나에 대한 노골적인 동정과 현 정부에 대한 증오를 담고 있다”고 지목하면서 탄압받기 시작했다. 이후 공연은 줄줄이 취소됐고, 제작진이 검찰에 기소됐다.

일각에선 이번 재판이 베르코비치가 과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는 활동을 한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보고 있다. 베르코비치는 전쟁을 비판하는 시를 썼고 반전 피켓 시위를 벌였다가 11일간 수감된 바 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레이철 덴버는 “러시아의 전쟁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베르코비치에게 버젓이 보복한 것”이라며 “불공정한 재판에서 완전히 터무니없는 혐의에 선고가 내려졌다”고 비판했다.

러시아는 전쟁 이후 국내 반전 목소리를 처벌하고 표현의 자유 역시 제한해 왔으나, 예술작품에 이런 잣대를 적용해 재판에 넘기고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옛소련 해체 이후 처음이라고 러시아 문화계 인사들은 밝혔다. 1만6000명에 이르는 러시아 문화예술인들이 두 연극인의 기소를 비판하고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에 동참했다. 피고인들은 이날 재판 결과에 곧바로 항소할 계획이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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