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냐, 여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로다’…공주로 변한 햄릿
동전 던져 성별 정하는 실험도
국립극단이 오는 29일까지 공연하는 셰익스피어 연극 ‘햄릿’의 주인공은 왕자가 아니라 공주다. 햄릿의 연인 오필리어도 남성이다. 여성 배우가 남성 배역을 연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성이 주도하는 극으로 변환했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젠더 프리’(gender-free) 캐스팅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으로 기존 성별 역할을 의도적으로 뒤집는 ‘젠더 벤딩’(gender-bending) 캐스팅 사례로 꼽힌다.
한때 여성은 무대에 오를 수조차 없었다. 여왕이 있던 영국에서도 1661년까지 여성이 극장 무대에 서는 게 불법이었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 여성 인물도 남성 배우들이 연기하던 시절이었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했고, ‘셰익스피어의 심장’으로도 불리는 런던 글로브 극장에서부터 반전이 본격화된다. 2016년 이 극장 예술감독에 취임한 엠마 라이스는 “셰익스피어의 등장인물 가운데 16%만이 여성이고, 기억에 남는 대사 대부분도 남성이 말한다”며 이를 바로잡겠다고 선언했다. 2108년 글로브 극장 예술감독 직책을 이어받은 배우 출신 미셸 테리는 아예 남녀 배우의 출연 비율을 반반으로 하겠다고 선포해 관철했다.
국내에서도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 이후 젠더 프리 캐스팅이 봇물 터지듯 퍼졌다. 연극과 뮤지컬은 물론, 전통 창극에서도 성별에 얽매이지 않는 캐스팅이 유행했다. 국립극단 ‘햄릿’을 각색한 정진새 극작가는 “몇 년 사이에 이런 시도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흐름이 형성됐다”고 했다. ‘햄릿 공주’를 연기한 배우 이봉련도 지난 8일 간담회에서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나 햄릿이 될 수있는 시대가 됐으니 공연을 마음껏 즐겨달라"며 웃었다.
국내외에서 성별 고정관념을 깨려는 다양한 실험이 이어졌다. 미국에서는 말로우의 연극 ‘닥터 파우스터스’ 공연을 앞두고 파우스터스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성별을 관객이 동전을 던져 결정하도록 했다. 국내에서도 연극 ‘오펀스’는 주인공인 남성 건달 배역을 여성 2명과 남성 2명이 돌아가며 맡았다. 연극 ‘아마데우스’에선 살리에리를 남성과 여성이 번갈아 연기했다. 독일 여성 배우 벨린드 루스 스티브는 대본 속 캐릭터를 ‘남성’ ‘여성’ ‘중립’ 등 세 가지 범주로 분석하는 캐스팅 프로그램인 ‘네로파’(Neropa·Neutral Roles Parity)를 개발했다. 여성 배우를 써도 무방한 ‘중립’ 캐릭터까지 남성이 도맡는 캐스팅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바뀌는 건 배역 만이 아니다. 배우 이봉련이 연기하는 햄릿은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유명한 대사는 “약한 자의 자리는 항상 악한 자한테 빼앗기지 (…) 악한 자여,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고쳐졌다. 해군 장교 출신에 칼싸움에도 능란한 햄릿 공주는 “착한 공주는 할 수있는 게 없지만, 악한 공주는 뭐든지 할 수 있지”라며 복수를 벼른다. 성별 캐스팅을 바꾸면서 작품의 서사와 메시지에도 일부 변화가 뒤따랐지만 원작의 뼈대는 변하지 않는다.
햄릿을 공주로 설정하게 된 출발점은 원작에서 불편하게 다가온 여성에 대한 혐오였다. 정진새 극작가는 “지금의 관객은 어떤 햄릿을 보고 싶어할까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 햄릿이 떠올랐다”고 했다. 배우만 여성으로 바꿔서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윤색을 맡은 부새롬 연출은 “영국은 여왕도 있던 나라인데, 햄릿이 공주도 될 수 있지 않겠냔 아이디어가 출발점이었다”고 했다. 주인공 햄릿을 공주로 바꾸니 연인 오필리어가 여성이면 ‘동성애 코드’가 작동해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오필리어는 남성이 맡게 됐다.
배역의 성별 파괴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성별 특성을 과장하거나 억지스럽게 연기하는 건 관객의 외면을 부를 수도 있다. 과도한 정치적 ‘피시’(PC·정치적 올바름)가 작품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일부 제기된다. 정진새 극작가는 “관객이 억지스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이야기에 개연성을 부여하려 고심했다”고 말했다. 남지수 연극 평론가는 “여성 캐릭터를 부각하기보다 인물들에게 논리적 개연성을 부여하는 데 공을 들인 것 같다”고 평했다.
공연에서 성비를 맞추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움직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김태희 연극 평론가는 “관건은 작품의 내적 연결성을 유지하며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설 수 있느냐일 것”이라고 짚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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