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러동맹 복원은 사상누각, 왜?[김상운의 빽투더퓨처]

김상운 기자 2024. 7. 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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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북러동맹의 역사

“귀하는 소련이나 중국으로 탈출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지 한 달이 채 안된 1950년 10월 13일,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는 북한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습니다. 성공적인 상륙 이후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미군에 맞서 김일성은 지원 병력을 다급히 요청했지만, 소련은 끝내 파병을 거부하죠.

반면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절망적인 편지를 보낸 지 엿새 만인 10월 19일 중공군의 참전을 결정합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란 말이 있듯, 이는 북한 외교의 중심 축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옮겨간 결정적 계기가 됐죠.

지난 달 김정은과 푸틴이 정상회담을 통해 동맹조약 부활을 선언했지만, 역사는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가 늘 아름답지 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노이 노딜’로 쇼크에 빠졌던 김정은이 중국을 제끼고 일단 러시아에 풀베팅을 한 형국이지만, 그동안 북러관계는 배신과 애증의 연속에 가까웠습니다.

북러 밀착 이후 한국의 자체 핵무장 주장까지 나오고 있지만, 과도한 불안을 갖기 보다 차분히 대응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그럼, 현 북러 밀착을 평가하기에 앞서 시계를 다시 한국전쟁 당시로 돌려보겠습니다.

‘유럽 세력확대’ 위해 한반도 이용한 스탈린

지난달 19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푸틴과 김정은이 악수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평양시민 수십 만명이 동원됐다. 노동신문
“한반도 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여 미국과 싸우게 하면 미국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못하게 될 겁니다. 이는 유럽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벌게 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스탈린이 1950년 8월 27일 클레멘트 고트발트 체코 공산당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그해 6월 28일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유엔군 파견을 결정할 당시 소련 측 유엔 대사가 불참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중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이유가 미국의 발을 아시아에 묶어 유럽에서 사회주의 세력 확대를 노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한 겁니다.

1951년 7월 시작된 정전협상이 2년이나 시간을 끈 것도 이런 스탈린의 의도가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최대한 전쟁을 오래 지속해 미국이 유럽에 개입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거죠. 소련의 안보 위협에 불안을 느낀 영국이 한반도에서 미국의 확전을 경계하고, 조속한 종전을 요구한 이유입니다.

냉혹한 현실주의자였던 스탈린은 손 안대고 코풀려는 격으로, 소련군의 전면적인 참전은 거부한 채(소수의 소련 공군도 중공군으로 위장해 투입) 중공군만 끌어들이는 지극히 이기적인 전략을 관철시켰습니다. 이처럼 소련의 대 한반도 전략은 철저히 유럽 중심 사고에서 한반도를 부차적인 방편으로 이용하는 행태를 보였죠.

이는 탈냉전을 촉발한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책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북한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1988년 서울올림픽 참가를 전격적으로 결정한 게 대표적입니다. 한국으로부터 경제 지원이 시급했던 소련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맞물려 1990년 9월 한국과 수교를 맺습니다. 조소동맹이란 봉인이 사실상 와해된 상황에서 소련은 이듬해인 1991년 9월 18일 안보리 이사국으로서 남북한의 UN 동시 가입을 지지하죠.

이렇게 남한 일변도로 편향돼 있던 러시아의 한반도 외교안보 정책은 소련 와해 후 옐친 때까지 이어지다 푸틴 집권 이후 서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KGB 출신으로 구소련 시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푸틴의 야망이 한반도에서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는 계기가 됐죠.

1999년 12월 집권한 푸틴은 이듬해 2월 이바노프 외무장관을 평양에 보내 ‘조러 우호선린협력조약’을 체결하고, 그해 7월 평양을 방문합니다. 당시 한국을 먼저 방문하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깬 것으로, 소련과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국가원수가 최초로 방북한 사례였습니다.

부활한 ‘북러 밀월’ 얼마나 갈까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쓰인 무기 파편에서 ‘순타지-2신’이라는 한글이 확인됐다. 북한이 러시아에 제공한 무기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경찰국 수사국장 페이스북
일각에선 김정은과 푸틴이 지난달 맺은 조약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한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는 점(러시아의 부족한 재래식 무기를 북한이 공급해주고, 대북제재로 곤란한 북한경제를 러시아가 지원)에서 종전 후 러시아가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거죠.

사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동맹에 시효가 있었다는 점, 특히 상대적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비대칭 동맹’은 ‘방기(abandonment)와 연루(entrapment)의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서 더 그렇습니다. 동맹을 맺고도 안보위기 시 약소국이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이 방기라면, 연루는 동맹으로 인해 강대국이 원치 않는 갈등(전쟁 등)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을 말합니다. 이를 북러동맹에 대입한다면 한반도에서 안보위기가 발생할 때 북한은 방기 위험에, 러시아는 연루의 위험에 빠질 수 있기에 상호 간 입장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특히 위에서 살펴봤듯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는 러시아의 경우 역사적으로 동아시아보다 유럽에 대한 정책 우선순위가 더 높기에 스탈린이 한국전쟁 참전을 외면한 것처럼 연루의 위험을 감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꽤 있습니다. 즉, 현재 러시아 외교안보 정책에서 최우선 순위인 우크라이나 전쟁이 마무리 되면,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줄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 지난 달 양국 정상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이 ‘동맹’이라는 표현을 세 차례 쓰면서 이를 부각한 반면, 푸틴은 이 단어를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러시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군사 상호원조 조항을 설명하면서 방어적 성격만 강조했죠. 이번 조약을 둘러싼 양국 간 온도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북중러 3각 관계에 미묘한 파장

시진핑과 푸틴이 2022년 2월 중국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두 정상은 미국과 동맹국들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AP=뉴시스
이번 조약은 북중러 3국 관계에 미묘한 파장을 던져주고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가 경쟁관계에 있는데다 1950, 60년대 중소 갈등기에는 북한을 서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한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중국으로서는 북러 밀착이 달갑지 않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시계를 1960년대로 돌려보죠.

1969년 3월 소련-중국 국경지대인 시베리아 우수리강의 젠바오섬에서 양국 간 교전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1956년 스탈린 사후 마오쩌둥이 소련 공산당과 사상투쟁을 벌이며 사회주의 종주국을 둘러싼 갈등을 벌인 게 원인이었죠.

1964~1969년 중소 양국이 4189회에 걸쳐 국경분쟁을 벌이는 등 갈등이 첨예해지자, 소련은 중국 핵시설에 대한 공격까지 검토합니다. 1969년 8월 아나톨리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가 미국에 중국에 대한 공격을 암시하며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죠. 이에 양국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미국이 7000km에 이르는 중소 접경지대를 정찰한 결과, 소련군 약 40개 사단이 무더기로 배치된 정황을 파악해 중국에 알려줬습니다. 한마디로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간 거였죠.

중소갈등 국면에서 북한은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실리를 취합니다. 예컨대 북한은 1960년까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무상원조의 43.17%와 30.75%를 각각 받아내죠. 또,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일으켜 친소파, 친중파(연안파)를 모두 제거하며 유일 지배체제의 기반을 구축합니다. 미중 데탕트 국면에선 북한이 소련으로 밀착 가능성을 암시하며 중국을 압박하기도 했죠.

북중러의 이런 미묘한 3각 관계는 이번 북러 밀착 국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중국은 지난달 푸틴 방북 기간에 한중 외교 안보대화를 진행하면서 일종의 견제구를 날렸죠. 또 중국 언론사 차이신(財新)은 북러 간 군사관계가 과열되고 있다면서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조항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한국 핵무장의 기회 비용

올 5월 김정은 참관 하에 실시된 북한군의 600㎜ 초대형 방사포 위력 시위 사격. 노동신문
북러동맹은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을 촉발시키고 있습니다.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한미 확장억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한편, 전술핵 재배치 및 NATO식 핵공유, 자체 핵무장 또는 잠재적 핵능력 구비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대안에 대한 정부 차원의 검토 및 전략적 공론화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적시했죠.

그러나 한국의 핵무장은 많은 기회비용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NPT 체제에 근거해 핵확산 방지에 주력하는 미국과의 동맹이 와해될 수 있습니다. 핵보유를 포기하는 대신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한다는 것이 한미동맹의 핵심 조건이기 때문이죠. 한국의 핵심 안보자산인 한미동맹을 포기하면서까지 핵무장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봉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는 국제사회로부터 전방위 제재입니다. 해외무역에 의존해 사는 한국이 미국, 유럽, 중국 등으로부터 금융, 경제제재를 받는다면 폐쇄국가인 북한 이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죠. 해외 의존도가 높을수록 경제제재의 파괴력은 더욱 커지기 마련입니다.

세번째는 핵 군비경쟁이라는 ‘안보 딜레마’에 빠질 우려입니다. 한국이 핵무장에 나서면 이웃국가인 일본도 동참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 전역이 핵군비 경쟁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는 안보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택한 핵개발이 도리어 위기를 확대하는 딜레마를 초래할 수 있죠.

한미동맹 기반 위에 한중관계 지렛대로

지난해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한미일 정상들. 북중러에 맞서는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중요한 안보 자산이다. 뉴시스
지금까지 다룬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① 러시아는 소련 시절부터 한국전쟁 참전을 거부하고 종전을 늦추는 등 유럽 중심 사고에서 한반도를 이용하는 행태를 보였고,

② 북러 간 비대칭 동맹의 구조상 러시아가 연루 위험을 회피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에

③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후 북러 밀착이 와해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④ 여기에 1950년대 중소갈등의 역사가 보여주듯, 러시아와 중국의 미묘한 경쟁관계가 북중러 3각 구도에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사항들을 고려할 때 북중 밀착에 과도한 불안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겁니다. 결국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한중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북중러 3각 구도의 불안정성을 파고들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한미동맹에 균열을 일으키고, 동아시아에서 안보 딜레마를 초래할 수 있는 핵무장론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참고 문헌]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러북정상회담 결과 평가 및 對 한반도 파급 영향> (INSS 전략보고, 2024년 6월)
-하상식 <러시아의대한반도 정책: 러시아, 북한관계를 중심으로>(국제정치논총 40집 4호, 200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련방 사이의 포괄적인 전략적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 (조선중앙통신 2024년 6월 20일)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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