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 설경구가 반가운 이유?.. 국민은 포장지가 아니라잖아!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김재동 객원기자] “난 단 한 번도 국민을 위해서 정치를 한 적이 없다. 나를 위해서 했지. 추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는 날 위해서. 불의한 자들의 지배를 받을 수 없는 나를 위해서.”
지난 6월 28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돌풍’의 12회 전편을 통해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다. “국민은 포장지가 아니다! 국민 타령 좀 그만 하라”는 작가의 분노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이 대사가 주인공 박동호(설경구 분)의 대사니 드라마의 성격도 규정됐다. 배경이 정치판이니 정치드라마고 주인공이 복수에 목숨 걸었으니 복수 드라마다. 다만 사적 복수가 공적 정의 실현에 이바지하는 정치 복수극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대의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제 생각이 옳다고 믿고 끝까지 가보는 한 남자의 행보를 따라갔을 뿐이다.
‘20대에 혁명에 피 끓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고 30대에 혁명에 젖어있으면 사회인이 아니다’란 말이 있다. 그 말에 따르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 박동호는 한 나라의 국무총리를 맡고도 20대에 머물고 있는 남자다.
존경하던 정치적 멘토 장일준(김홍파 분)이 대통령이 됐다. 민주화를 위한 그 헌신을 세계가 인정해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위인이다. 그러나 또한 아버지였다. 아들이 사모펀드 비리에 연루되며 재벌과 손을 잡았다. 그들이 야합하는 동안 대진그룹과 연관된 사모펀드의 실체를 쫓던 박동호의 절친 서기태(박경찬 분) 의원은 뇌물수수의 누명을 쓰고 세상을 뜬다.
박동호 역시 대진그룹의 비자금 정관계 살포 추적 중 대통령으로서 받아선 안될 자금의 수수 사실을 확인하고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한다. 하지만 오히려 세무조사 무마 명목 금품수수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이 시점에서 박동호는 장일준 시해를 기획한다. 민주화 투사, 노벨 평화상 수상자란 허울을 쓰고 장일준이 만들어 갈 미래가 이 나라의 역사가 돼선 안된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권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고백이 담긴 보이스펜을 비서실장 최연숙(김미숙 분)에게 맡기고 도움을 요청한다. 차기 대선때까지만 대통령 권한 대행의 권력을 맡겨달라고. 그 기간 내에 재벌 비호세력인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 분) 등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재벌개혁을 완수하겠다고. 물론 제 몸의 티끌은 제가 털고 가겠다는 결기도 보인다. 그 티끌이 태산이 되면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털겠다는 결기.
이 뒤 없는 남자와 영활한 안타고니스트 정수진의 공방은 1화부터 매회 숨돌릴 틈 없이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박동호는 닳고 닳은 정치꾼 박창식(김종구 분), 악명높은 공안검사 출신 조상천(장광 분), 돈으로 정치를 부리는 대진그룹 강회장(박근형 분)은 물론 제1 타도대상 정수진(김희애 분)까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이들과 야합도 한다. 목적은 단 하나, 그들 모두를 끌어안고 퇴장하는 것.
자신의 방식이 정의롭지 못함은 스스로도 안다. 원칙주의자인 검사친구 이장석(전배수 분)의 질타도 수용한다. 다만 세상의 오물을 치우는 자신의 일이 끝나기 전 이장석의 손에 먼저 체포되는 것. 그리고 그럴 경우 자신이 권력을 앞세워 이장석을 훼방놓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것만이 두려울 뿐이다.
박동호는 그런 일관된 벽창호 캐릭터다. 하지만 반대편의 정수진은 양가감정에 휘둘리는 캐릭터다. 정수진은 자신을 대진그룹 부회장(김영민 분)의 덫으로 끌어들인 전대협 의장 출신의 남편 한민호(이해영 분)를 원망한다. “당신이 박동호여야 했어.. 부끄럽다. 내 젊은 날이.. 왜 이런 사람을 바라봤을까? 왜 이런 사람을 버리지 못할까?”
사람들은 이런 죄책감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합리화가 필요하다. “장일준이 깨어나서 우리를 구할 수 없다면 깨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그가 준 손수건으로 그의 숨구멍을 막으면서는 “장일준을 죽이고 장일준의 정신을 살리겠다. 우리의 꿈, 우리가 살았던 시간을 자랑스런 역사로 만들겠다”고 울면서 강변한다. 장일준의 정치적 적자를 자처하며 ‘장일준의 유산 계승’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대중적 지지도 확보한다.
하지만 박동호의 사망으로 긴 싸움이 종결된 후 맞은 승리의 순간은 눈 앞에서 모래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입은 단말마를 발한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가 무슨 짓까지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녀의 자의식 역시 입버릇처럼 내뱉던 국민이니, 나라니, 장일준 정신이니 따위의 포장은 어쨌든 간에 권력욕이란 내용물에만 관심이 있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독백이 아닐 수 없다.
박동호는 죽어서까지 복수에 성공했고 정수진은 죽은 박동호에 멱살 잡혀 나락까지 끌려간다. 사즉필생의 박동호는 생전 ‘배신자’의 프레임을 벗고 ‘깨끗한 대통령’으로 죽은 후에 부활하고, 생즉필사의 정수진은 말년을 오물 인생으로 죽은 듯 살게 된다.
대부분의 인생이 현실과 타협한다. 특별히 욕 먹을 일이 아니다. 양심에 떳떳하기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박동호를 바라보는 정수진이 “왜 이렇게까지?”하는 의문을 갖는 것도 마땅하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런 세상에 박동호 같은 판타지 하나쯤 존재하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드라마에 정치적 해석을 덧붙이는 건 각자의 몫이다. 개인적으로는 서스펜스에 항복할 수밖에 없는 재밌는 드라마였다. 대의를 뜬 구름 잡는 포장 없이 한 인간의 신념으로 축소시킨 메시지 전달방법도 맘에 든다. 끝은 어찌 될지 모르지만 시작은 내가 한다는 주인공의 배짱은 제법 부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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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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