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VC가 몰려온다]① 한 달에 네 개꼴로 개업한 VC… 이젠 ‘자본 잠식’ 릴레이 경고장
스타트업 붐에 힘입어 우후죽순 생겨난 신생 벤처캐피털(VC)에 잇달아 경고장이 날아들고 있다. 펀드 결성에 실패해 투자 재원을 마련하지 못한 VC들이 자본금만 까먹는 신세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서만 5곳의 VC가 자본잠식으로 경영건전성 미달 경고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동성이 풍부하던 시절 세운 야심찬 목표와는 다르게 투자 혹한기를 정면에서 맞고 있는 모양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본잠식 위기를 맞은 VC 중 상당수는 라이선스를 자진 반납하며 사업 자체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올해는 이미 새로 설립된 VC와 라이선스가 말소된 VC의 수가 같은 상황이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펀드 없이 자기자본(고유계정)으로 소액만 투자하며 연명하는 운용사도 있다. 업계에서는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올해부터 VC들의 줄폐업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 버는 돈 없이 자본금만 까먹는 신생 VC
9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자본잠식으로 중기부의 경고장을 받은 VC는 총 5곳에 달한다. 네오인사이트벤처스, 엔피엑스벤처스, 오라클벤처투자, 더시드인베스트먼트, 도원인베스트먼트 등이다. 이런 추세라면 지난해 자본잠식에 빠진 VC 수(8곳)를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 자본잠식에 빠진 VC 수는 ▲2020년 2개 ▲2021년 4개 ▲2022년 6개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경영난이 가중되면서 아예 사업을 접은 VC들도 있다. 루트벤처스·IDG캐피탈파트너스코리아·플랫폼파트너스자산운용·이랜드벤처스·예원파트너스 등이 올해 상반기 중 폐업했다. 신생 VC들은 출자자(LP)를 모으지 못해 펀드 결성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펀드 관리·성과 보수를 벌지 못한 채 인건비 등 고정비용을 지출할 수밖에 없고, 결국 자본잠식에 빠지거나 폐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VC는 설립 근거법인 ‘벤처투자 촉진에 관한 법률(벤처투자촉진법)’에 따라 자본잠식률 50% 미만을 유지해야 한다. 기준을 미충족할 시 중기부는 자본금 증액, 이익 배당 제한 등 경영 개선 조치를 부과한다. 이후 9개월이 지나도록 이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VC 등록 면허가 말소된다.
VC들의 줄폐업 및 자본잠식은 벤처 투자가 호황을 이뤘던 2020~2022년과 상반되는 현상이다. 당시 2년간 국내에서 영업을 시작한 VC는 총 104곳에 달했다. 현재 영업 중인 VC(총 249개)의 41.7%에 달하는 규모다. 올해 들어 자본잠식으로 경고장을 받거나 라이선스를 반납한 10개 운용사 중 9곳도 2021~2022년 창투사 라이선스를 취득한 VC들이다. 호황기를 타고 너도나도 앞다퉈 VC를 설립했지만, 시장이 혹한기를 맞으며 직격탄이 날아온 것이다.
폐업이나 자본잠식까지는 안 갔지만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로 연명 중인 VC도 많다. 작년 말 기준으로 블라인드펀드가 한 개도 없으면서 1년간 투자 이력도 전무한 VC는 총 45개에 달했다. 이런 VC의 개수는 ▲2020년 19개 ▲2021년 30개 ▲2022년 36개 ▲2023년 45개로 매년 급증하는 추세다. 올해도 1분기 말 기준으로 펀드가 한 개도 없고 투자 이력도 없는 VC가 29개에 육박했다.
VC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고금리와 경기 침체가 이어지며 신생 VC들이 펀드 결성에 어려움을 겪고, 반대로 대형 VC에만 유동성이 몰리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이 위축될수록 명성과 실적(트랙레코드)을 두루 갖춘 대형 VC에 자금이 편중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VC 관계자는 “신생 VC들의 경우 어렵게 모태펀드 출자 사업에 선정되는 등 정부의 정책 자금을 받더라도, 정작 민간에서 자금 매칭이 어려워 펀드를 결성하는 게 굉장히 힘든 상황”이라며 “펀드레이징에 실패해 VC 라이선스를 반납하는 곳이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 자기자본 투자로 연명… 100만원에서 625만원까지
이처럼 신생 VC들은 눈물겨운 생존기를 이어가고 있다. 라이선스를 지키기 위해 자기자본만으로 겨우 투자하며 ‘잠행’에 들어간 운용사들도 많다. 투자 실적이 없으면 중기부의 제재를 거쳐 라이선스를 말소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소액의 투자금으로 트랙레코드만 쌓는 요식 행위가 빈번하게 발견된다.
A인베스트먼트는 지난해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100만원의 투자 1건만 집행했다. 문제는 벤처펀드를 통한 투자가 아닌 고유계정(자기자본) 투자라는 점이다. 고유계정 투자는 기관투자자(LP)의 자금이 아닌 VC의 자기자본으로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VC는 펀드를 통해 투자를 집행한다. 고유계정으로 투자하더라도 GP커밋(고유계정 자금을 펀드에 투입하는 것) 형태로 이뤄진다. 고유계정 투자와 펀드 투자의 포트폴리오가 다르면 LP들의 신뢰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LP 관계자는 “위탁운용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고유 계정 투자 현황을 보는 곳도 있다”며 “좋은 포트폴리오는 고유 계정으로 담는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올해 고유계정으로만 투자를 집행한 VC는 A인베스트먼트를 포함해 10곳에 달한다. A인베스트먼트의 뒤를 이은 VC는 B인베스트먼트로 625만5000원을 투자했다. 이런 곳들은 ▲2019년 2곳 ▲2020년 5곳 ▲2021년 7곳 ▲2022년 9곳, ▲2023년 11곳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소형 VC가 100만원 등 소액으로 투자 실적을 쌓는 경우는 K-OTC 등을 통한 비상장 구주 거래 가능성이 크다”며 “이런 수준의 소액 투자는 다른 VC와 클럽 딜 형태로도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비상장 거래 플랫폼을 통한 구주 거래가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중기부의 경고를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된다. 벤처투자촉진법 제49조 제1항 제4호에 따라 등록 3년이 지나기 전까지 정당한 사유 없이 1년 이상 투자가 없으면 제재를 받는다. 중기부 제재는 6개월 이내의 업무정지 명령, 시정명령 또는 경고 조치, 그리고 최악의 경우 라이선스 등록 취소(말소)까지도 내려진다.
VC 유관기관의 한 관계자는 “지인이나 본인이 사외이사 등으로 재직 중인 곳과 이야기를 나눈 후 투자를 집행한 것으로 보인다”며 “벤처투자촉진법상 투자 가능 회사들은 창업기업과 벤처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등도 포함되기 때문에 생각보다 범위가 넓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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