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독서광이냐, 도서광이냐

곽아람 기자 2024. 7. 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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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쓴 패트릭 브링리. /©Ross White

패트릭 브링리 에세이집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웅진지식하우스)는

여러모로 저와 인연이 깊은 책입니다.

지난해 이 책 발간 전에 뒷표지에 들어가는 추천사 의뢰를 받아,

편집자를 제외한 제1호 독자가 되어 출간전 책을 미리 읽어볼 수 있었지요.

추천사 쓰려고 책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은

‘지적 깊이와 영적 깊이를 함께 갖춘 보기 드물게 좋은 책이지만, 많이 팔릴지는 모르겠다’였습니다.

저는 저자가 자신의 상처와 결함을 직면하고 드러내는 영미식 에세이를 좋아하는데,

대부분의 한국 독자들은 그를 낯설어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더라고요.

게다가 책 내용 대부분이 미술품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림 한 장 실려있지 않아 미술사 전공자가 아니면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긴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루브르 박물관도 아닌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독자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도 미지수였고요.

그런데 이런 제 예측은 결국 틀린 것으로 판명났습니다.

유명 영화평론가가 유튜브에서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소개하더니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되더군요.

유명인이 소개한다고 해서 반드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아닌데

이 책의 운명은 그러했나 봅니다.

덕분에 저도 ‘베스트셀러 저자의 삶’을 한동안 경험했습니다.

평소에 독서를 거의 하지 않는 분들조차 “네 이름 봤어. 책 뒷표지에서” 하며 연락을 해 오시더라고요. ^^;

저자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계기가 없어 기회만 보고 있다가,

온라인 서점 알라딘 올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는 걸 보고

‘이 때다’ 하고 인터뷰를 신청했습니다.

지난 11월 출간돼 지금까지 모두 16만 8000부 팔렸다고 하네요.

해외 저자 인터뷰를 할 경우, 대면이 여의치 않으면

줌 등을 통한 화상 인터뷰나 이메일로 서면 인터뷰를 하는데요.

글을 잘 쓰는 저자의 경우 화상보다 서면 인터뷰가 훨씬 나은 경우가 많은데,

브링리 역시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이메일의 문장이 깊이 있고 아름다워서, 몇 번이나 거듭 읽어보았습니다.

‘뉴요커’ 행사 담당 직원으로 일하던 브링리는

갑작스럽게 형이 죽자 충격을 받고 직장을 그만둔 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직원으로 취직해 10년간의 ‘애도 여정’을 이어가는데요,

“왜 하필 메트 경비원이었냐”라고 묻자 이렇게 답하더군요.

I didn’t want to hurry back to an office job where I’d be thinking about office politics and corporate ladder and other things that felt like trivial nonsense. I wanted to stand still awhile, and I found this remarkable job where I could stand still professionally in the most beautiful place I knew.

슬픔이 너무 깊어서,

그 슬픔이 가슴을 할퀴어서,

그냥 가만히 서 있고만 싶은 기분,

누구나 느껴본 적 없지 않나요?

망부석처럼 서 있고 싶지만 입에 풀칠은 해야겠기에,

고요히 서 있을 수 있는 직업을 택했다는 이야기가 특히 와 닿았습니다.

형 세상 떠난 후 '뉴요커' 그만두고… 메트 경비원으로 10년간 애도 여정

3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4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관람객들이 책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독서광이 아니라 도서광을 위한 곳.”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이 말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한 이용자가 독서 인구는 점점 줄어든다는데

평일에도 도서전 현장이 북적대는 이유를 궁금해하며

‘아직 못 읽은 책도 많은데 또 책 욕심을 내서 사온 건 무슨 이유일까?’라고 자문하자 누군가 단 댓글이었죠.

‘도서전에 도착하자마자 책을 담을 에코백부터 샀다’,

‘에코백에 담으면 어깨가 무거울 것 같아 배낭을 메고 갔다’,

‘나는 아예 슈트케이스를 끌고 갔다’ 등등의 체험담과 함께

“저도 독서광이 아니라 도서광인가봐요” 고백하는 댓글이 줄을 이어 달렸습니다.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

소설가 김영하가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했다는 이 말을 소환하며

‘읽지도 않을 책을 왜 샀을까’라는 죄책감을 더는 이들도 있었고요.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은 예년과 달리 정부 지원금 없이 치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 수는 지난해 13만명에서 15만명으로 늘며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예산 문제로 지난해보다 규모를 줄여 개최했는데,

사람은 더 많이 몰리는 바람에 주말엔 입장에만 1시간 이상 걸리기도 했지요.

관람객들은 불편을 겪었지만 시장이 붐빈다는 건 출판사 입장에선 고무적인 일이죠.

가지, 목수책방, 메멘토, 에디토리얼, 혜화1117 등 1인출판사 여성 대표 다섯 명이

최근 ‘출판하는 언니들’이라는 공동 브랜드를 만들어 도서전에 참여했는데요.

도서전에서 각 출판사가 원하는만큼 매출액을 달성하면 내년에도 함께 부스를 꾸리기로 약속했는데,

모두 목표 금액을 거뜬히 넘겼다고 합니다.

독서광이면 어떻고, 도서광이면 어떻습니까.

‘책은 사서 읽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모쪼록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곽아람 Books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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