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또 하나의 폐지법안 발의… 민주당은 국정원 무력화를 원하나

채성준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2024. 7. 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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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矛盾)은 전국시대 초나라 상인이 ‘어떤 방패로도 막지 못한다는 창’을 다 팔고 나서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하는 방패’를 팔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어떤 사실의 앞뒤가 맞지 않다는 걸 뜻하는 고사성어지만 무기 발달 과정에서 창과 방패가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스파이 역사도 마찬가지다. 스파이, 즉 정보활동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가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 수단이다. 기원전 600년경에 쓰인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이는 상대편에도 같이 적용된다. 결국 누가 지키고 누가 훔쳐내느냐의 싸움이다. 지키는 것을 방첩이라고 한다. 정보활동이 창이라면 방첩은 방패인 셈이다.

지난 3일 더불어민주당 이기헌 의원이 안보 범죄에 관한 국정원의 조사권 폐지를 골자로 한 국정원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신원조회를 위해 수집한 정보를 활용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대공 수사권이 없는 국정원이 조사권을 갖는 것은 헌법상 적법 절차 원칙과 형사법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 신원조사 권한과 관련해서는 대통령령인 ‘보안업무규정’ 자체가 법률 근거 없는 위법한 규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정보 및 방첩활동의 기본을 모르는 모순된 얘기다. 국가정보활동의 기능은 잠재적 적국의 전략적 기습을 조기 경보하는 데 있다. 전략적 기습은 국가 안보에 충분한 정도의 위협을 주는 전술적 기습과 달리 국가 안보에 치명적 위협을 줄 수 있는 위험을 말한다. 군대가 전쟁을 위해 필요하듯이 정보기관은 국가 안보에 ‘워치도그(watchdog)’ 역할을 하고자 존재한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엄청난 예산을 들여 국가 정보기관을 운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제재에 따른 심각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대남 적화를 위한 ‘3대 혁명 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끊임없이 간첩을 남파하고 남한 내 지하당 구축을 위한 공작을 자행해왔다. 북한의 위협 외에도 탈냉전 이후 국제질서가 다극화되면서 테러리즘, 산업스파이, 사이버 테러, 국제범죄와 같은 초국가적인 위협이 대두되고 있다. 냉전의 산물인 민족 분단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안보 위협에도 대응해야 하는 이중 부담에 직면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세계 각국은 저마다 안보 상황에 부합하는 법과 제도를 유지한다. 미국은 형법 이외에도 특별법 형태로 연방간첩법, 선동금지법, 외국인등록법, 국가안보법, 공산주의자규제법, 외국인등록법, 외국정보감시법, 방첩강화법, 경제스파이법 등을 두고 있다. 9·11 테러를 계기로 테러에 관한 수사를 위해 시민의 자유권을 제약할 수 있는 ‘애국자법’을 운영하기도 했다.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전체주의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도 1953년 정전을 계기로 군사비밀이나 문서·자료·시설 등을 간첩과 같은 불순분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사기밀보호규정’ 및 ‘비밀취급인가규정’을 제정하면서 일찌감치 보안의 개념이 정립됐다.

이기헌 의원은 국정원의 안보 범죄 조사권 폐지는 ‘대공 수사권 이관의 실효적 안착’을 위해, 그리고 신원조사 권한 중지는 ‘국정원의 정부 인사 개입 차단’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 이뤄진 대공 수사권 이관으로 인해 국정원, 경찰, 군(軍) 방첩사라는 3축의 수사 체제가 무너지면서 대공 전선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국정원의 안보 범죄 조사권까지 없어진다면 경찰과의 정보 공유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북한의 대남 공작 앞에서 무장 해제한 것이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국가 정보기관의 기본 업무마저 없애겠다는 것은 창과 방패를 죄다 무력화하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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