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툭하면 ‘법정진술’ 들어 상고…과거사 누명벗기 ‘발목’
고문·강압에 의한 자백 인정하면서도 ‘변호인 도움 받은 진술은 증거능력’ 주장
하급심 무죄 판결에도 강행, 유족들 “고통 계속”…재판부마다 다른 판단도 문제
검찰이 과거사 재심 재판에서 ‘과거 법정진술’의 증거능력 인정을 주장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과거 유죄 판결이 나온 용공·간첩 사건을 두고 수사 과정 중 고문·강압에 의한 진술의 위법성은 인정하면서도 재판 과정 중 혐의 인정 취지의 진술은 유효하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과거사 재심 사건 피고인과 유족들은 “수사단계에서의 가혹행위로 인한 진술이 법정까지 이어졌다”면서 “검찰이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검찰은 수사단계 중 강요·유도로 끌어낸 피의자신문 내용과 별개로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변호인 도움을 받아 한 진술은 증거능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재심 재판부가 검찰의 이 같은 주장을 인정한 적도 있다. 재심에서 무죄가 나더라도 검찰은 재판 과정에서의 진술을 근거로 들며 항소하기 일쑤다.
경향신문은 8일 검찰이 지난달 대법원에 낸 고 최창일씨 재심 사건의 상고이유서를 입수했다. 검찰은 상고이유서에서 최씨가 과거 재판에서 ‘사선 변호인을 선임해 변호인 조력을 받은 상태에서 법정진술’을 했고, ‘검찰 진술도 부인하는 등 일부 사실관계를 인정하지 않은 사실도 있다’는 점을 주요하게 강조했다. 검찰은 법정진술이 자백 증거능력으로 인정돼 재심에서도 유죄 선고가 난 판결 7건을 열거하면서 “재심 사건 재판부가 최씨의 법정진술 증거능력을 부정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법정진술이 증거능력으로 인정돼 유죄가 유지된 대표적인 사건은 1967~1973년 통일혁명당(통혁당) 재건 도모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대식씨의 재심 사건이다. 북한 지령을 받은 인사들이 지하 정당인 통혁당을 결성해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게 당시 중앙정보부의 발표 내용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터진 대형 공안사건 가운데 하나다.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유죄 판결을 받고 20년을 복역한 이씨의 재심 선고는 2022년 7월 나왔다. 이씨는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등 12건의 혐의에 대해선 무죄가 선고됐다. 남파공작원의 지하조직원에게 김일성 회갑 축하 선물과 메시지를 전달하고, 남파공작원으로부터 15만원을 받았다는 혐의 등은 유죄로 인정됐다. 검찰은 이씨가 법정에서 한 진술이 ‘변호인 접견권이 본질적으로 침해되지 않았으며’ ‘공소사실 중 인정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점을 명확히 구분해 진술’했기 때문에 증거능력이 있다고 주장했고, 재판부는 이를 인정했다.
1981년 이른바 ‘안동간첩단 사건’도 비슷하다. 안승억씨는 재심에서 간첩행위 방조에 대해선 끝내 혐의를 벗지 못했다. 이씨 사례와 마찬가지로 안씨의 법정진술이 증거능력으로 인정됐다. 검찰은 이들의 재심 판결을 사례로 들면서 “피고인들은 과거 법정에서 변호인 조력을 받아 중앙정보부로부터 폭행 등을 당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며 “임의성이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판결 내용”이라고 밝혔다.
검찰의 주장은 이번 최씨 재심 사건 하급심 판결 취지와는 상반된다. 지난 5월 서울고법은 최씨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불법구금 등 심리적 압박상태가 법정진술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살피면서, 법정진술 번복이 오히려 불리한 결과로 돌아올 것을 우려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상황에서,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할 경우 오히려 최창일씨에게 불리한 재판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당시 법정에서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됐다고 볼 만한 의문점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일부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진술을 했다는 등 사정만으로는 임의성의 의문점을 해소할 충분한 증명이 이뤄졌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과거 법정진술에 대한 판단을 재판부마다 달리하면서 과거사 재심 사건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같은 주장을 되풀이해야 한다. 누명을 벗는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고, 피해자와 유족의 고통은 그만큼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오는 11일 마지막 변론이 예정된 고 진두현·박석주씨의 ‘통혁당 재건위’ 재심 사건도 과거 법정진술의 증거능력 인정 여부가 쟁점이다.
1974년 보안사는 재일교포 진씨와 박씨 등을 일본 거점 간첩단으로 몰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이듬해 법원은 진씨에게 사형을, 박씨에게는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이들의 유족은 2017년 10월 재심청구서를 냈고 6년 만인 2023년 7월 재심 개시 결정이 이뤄졌다. 같은 해 9월부터 현재까지 공판이 총 6번 진행됐다.
변호인 측은 이들이 보안사에 연행돼 온갖 고문과 회유로 심리적 압박을 받은 상태로 피의자신문조서를 받고 재판에 넘겨져 선고가 나오는 데까지 1년도 채 걸리지 않은 점, 진씨의 경우 교도소 구금 중 수사기관 회유에 따라 진술서를 써야 했던 점 등을 근거로 “법정진술은 임의성이 없으므로 유죄 인정 증거로 사용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혁당 재건위 재심 사건에서 ‘법정진술’ 증거능력 문제가 불거진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박기래씨는 지난해 5월 재심 끝에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수사기관에서 가혹행위로 임의성이 없는 자백을 하고 이후에도 그런 심리상태가 계속돼 동일한 자백을 했다면 법정진술도 임의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법정진술 당시 변호인 조력을 받았더라도 가혹행위로 인한 박씨의 심리적 압박이 해소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의 판단이다. 대법원도 원심 판결을 수긍하면서 무죄를 확정했다. 다만 대법원은 법정진술의 증거능력에 대해 별도 의견을 밝히진 않았다.
과거사 재심 피해 유족들은 대법원 차원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박석주씨의 아들은 “가뜩이나 과거사 재심 청구부터 개시 결정까지 시간이 더뎌 유족으로선 화가 나는데 과거 법정진술을 이유로 또다시 검찰 상고에 따라 법원 판단을 기다리게 되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사안마다 다르겠지만,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법정에서의 진술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까닭에 임의성 여부도 다르게 판단하고 있다”며 “검찰 역시 같은 이유로 상고를 반복하면서 유족들은 마냥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상급심 대법원에서 전원합의체로 정리가 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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