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안개 속에 흐르는 따뜻한 가족애…故 이선균 유작 '탈출'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재난 영화는 생사가 오가는 극단적인 상황에 빠진 인간군상을 그리면서 평화로운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포착해낸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주인공이 악마적인 본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이기적으로 살던 주인공이 더 높은 가치에 눈을 뜨고 자기를 희생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김태곤 감독의 신작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이하 '탈출')는 재난 속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재난 영화이자 따뜻한 가족 영화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지난해 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배우 이선균이 주인공 정원을 연기했다.
정원은 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서 근무하는 행정관이다. 정무 감각이 뛰어난 그는 차기 대선 주자인 안보실장(김태우)의 핵심 참모이기도 하다.
아내와 사별하고 중학생 딸 경민(김수안)과 단둘이 사는 정원은 집에선 그리 좋은 아빠가 아니다. 유학길에 오른 딸을 배웅하려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차에서도 딸과 진심 어린 대화를 하지 못한다.
부녀는 짙은 안개가 낀 바다 위 대교를 건너다가 최악의 연쇄 추돌 사고를 당한다. 100대에 달하는 사고 차량 중에는 정부가 '프로젝트 사일런스'라는 이름의 비밀 작전으로 양성한 군사용 맹견 열한 마리를 이송하던 트럭도 있다.
사고 차량에 탑승한 사람들이 대교에 고립되고 맹견들이 풀려나면서 무서운 사건이 벌어진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헬기가 추락하며 대교도 붕괴 위기를 맞는다.
정원과 경민 외에도 프로 골퍼 유라(박주현)와 그의 언니 미란(박희본), 기억을 잃어가는 순옥(예수정)과 남편 병학(문성근) 등이 대교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려고 몸부림친다. 이들이 각각 가족관계라는 설정이 영화의 성격을 규정한다.
'탈출'은 재난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국내 최대인 1천300평(약 4천300㎡) 규모의 세트에서 촬영하면서 사고 현장을 실감 나게 구현한 데 따른 것이다. 300대가 넘는 차량을 중장비로 세트에 설치하고, 부서진 차량의 잔해와 같은 '디테일'에도 신경 썼다는 게 제작진의 설명이다.
여기에 첨단 시각특수효과(VFX)로 사실적인 스펙터클을 완성했다. 극 중 사고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검은 맹견들도 VFX로 구현했다.
바다 위 대교에 낀 짙은 안개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그 차가움이 피부에 닿는 듯하다. 여기에서 오는 시원한 느낌은 '탈출'이 여름 개봉작으로서 가지는 강점이기도 하다.
정무적 판단 능력 하나만 믿고 살다가 극단적인 재난 속에서 정부가 내린 정무적 판단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지는 정원을 이선균은 뛰어난 연기로 그려낸다.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와 생동감 넘치는 표정도 생전 모습 그대로다.
극에 코믹한 요소로 활력을 불어넣는 건 돈을 벌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견인차 기사 조박(주지훈)이다. 조박의 능청스러운 모습은 '비공식작전'(2023)에서 주지훈이 연기한 택시 기사 판수를 연상시킨다.
실감 나는 스펙터클과 배우들의 연기가 몰입감을 주지만, 극 중 인물들이 변모하는 과정이 어디서 본 듯 다소 전형적인 느낌을 주는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김태곤 감독은 김혜수 주연의 코미디 '굿바이 싱글'(2016)로 주목받았다. 김 감독은 8일 '탈출' 시사회에서 "이선균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면서 장면 하나하나를 연출했다"며 "선균이 형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2021년 촬영을 마친 '탈출'은 지난해 제76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도 초청된 작품으로, 개봉 시기를 잡지 못하다가 극장에 걸리게 됐다. 제작비가 185억원으로, 올여름 성수기를 맞아 개봉하는 한국 영화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12일 개봉. 96분. 15세 관람가.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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