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연판장

배성규 기자 2024. 7. 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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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후한 황제 헌제의 신하 동승은 권력자 조조를 제거하기 위해 연판장을 만들었다. 유비와 마등 등 반(反)조조 세력이 대거 서명했다. 하지만 조조 암살 계획이 주변의 밀고로 들통나면서 유비를 제외한 700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최초로 기록된 연판장 파동이다.

▶연판장(連判狀)은 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달아 서명하거나 도장을 찍은 문서다. 서양에선 원형으로 서명한 연판장을 ‘라운드 로빈(Round Robin·둥근 리본)’이라고 불렀다. 원형으로 이름을 쓰면 그것만으론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피로 서명한 혈판장도 있다. 약자인 농민이나 비주류, 하위직이 권력자나 주류에 대항해 단합된 의견과 힘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권력자에 대한 뒷담화가 공식적·집단적 의견 표출로 이어진 것이기도 했다. 서명자가 집단의 이름 뒤에 숨을 수 있어서 불이익을 덜 받을 것이란 심리가 참여도를 높인다. 하지만 하극상으로 받아들여져 피의 보복이나 사회적 파장을 낳은 경우도 많았다.

▶일본에선 막부 시대 영주들의 무리한 세금 징수와 무자비한 처벌 등에 반발해 농민들이 연판장을 돌렸다. 센다이 영주 다테 쓰나무네는 연판장으로 자리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연판장 맨 앞에 서명한 사람은 주모자로 몰려 처형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종이우산에 방사형으로 이름을 적어 주모자를 감췄다. ‘가라카사(傘)’ 연판장이다. 영국에서도 해군 병사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라운드 로빈’ 연판장을 돌렸다. 프랑스에서 귀족들이 왕에게 청원할 때도 같은 방식을 썼다.

▶고부 민란 직전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은 사발통문(沙鉢通文) 연판장을 만들었다. 사발을 엎어 원을 만든 뒤 참가자 이름을 적는 사발통문은 원래 보부상들의 연락 수단이었는데 농민군 지도부를 보호하기 위해 차용했다. 조선 말 유생들은 연판장 성격의 유통(儒通)을 돌렸다. 1960년엔 젊은 장교들이 부정선거와 군 부패를 비판하는 연판장을 추진했고, 1999년엔 정권의 시녀가 돼선 안 된다며 검사들이 연판장을 돌렸다.

▶최근 국민의힘 친윤계 당협위원장들이 윤석열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온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당대표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린다고 한다. 작년엔 이들이 나경원 의원 사퇴를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총선 직전 친이재명계 의원들이 이낙연 전 대표의 신당 창당을 반대하는 연판장을 만들었다. 약자와 비주류가 권력에 맞서는 수단이었던 연판장을 오히려 권력 측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국민이 얼마나 공감할지가 관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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