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도 칼럼] 무능과 오만 사이
여야 대치 바탕은 두 사람…국민에 희망줄 정치 하라
“(전화번호)800-7070, 대통령인가요?” “대통령의 전화번호는 기밀상 외부로 유출할 수 없습니다.”
국회 운영위원회가 열린 지난 1일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 대화다. ‘02-800-7070’이 대통령실 어느 부서 내선 번호인지 따지는 과정이다. 민주당은 이 번호를 해병대 채상병 수사 외압 의혹을 풀 열쇠로 여긴다. 윤석열 대통령을 겨눈 ‘VIP 격노설’의 도화선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7월 31일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가 끝날 무렵 이 번호로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가 왔고, 이 장관이 채상병 사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민주당은 지난 4일 국회 본회의에서 채상병 특검법을 통과시켰다. 21대 국회 때처럼 윤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예상하면서도 훨씬 수사 범위를 넓히고 야당 장악력을 높였다.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로 저항한 국민의힘은 수적 열세를 또 확인했다. “윤 대통령 탄핵의 교두보”라는 국민의힘 주장에서 궁지에 몰린 윤 대통령 처지가 드러난다. 800-7070은 그 예다.
이재명 민주당 전 대표는 결이 다른 전화번호 논란을 빚었다. 그는 지난달 30일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전화 문자 그만 좀…시도 때도 없는 문자, 전화는 응원 격려가 아니라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는 글을 올렸다.
지난달 24일 당대표직 사퇴 후 연임 도전 의사를 밝힌 그다.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당대표 연임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대권 도전의 탄탄대로가 펼쳐진 건 아니다. 쌍방울그룹 대북송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제3자 뇌물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됨에 따라 그가 받아야 할 재판이 대장동 의혹 사건을 포함해 모두 4개로 늘었다.
그래서 이 글은 그의 든든한 지지층, 이른바 개딸(개혁의 딸들)에게 자제를 요청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앞서 야권 성향 유튜브 운영자가 ‘더 응원하자’는 취지로 이 전 대표 전화번호를 공개했다고 한다. 응원과 고통 사이 그 어디쯤이 그의 심경일 터이다. 2021년 4월 이런 일은 ‘일상의 일부’라고 웃어넘겼던 경기지사 시절과 달라졌다. 그만큼 사법 리스크는 그가 넘어야 할 난관임이 분명하다. 당장 이 전 대표 부부는 경기지사 시절 부인 김혜경 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과 관련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다.
윤 대통령은 사면초가다.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가 발의해 달라는 국민청원과 관련한 청문회 준비 절차가 9일 시작된다. 이 청원 참여자가 130만 명을 넘었다. 민주당은 여론을 살피며 윤 대통령과 여당을 거세게 압박할 태세다. 사안의 진실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채상병 수사 외압 의혹과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등 빌미를 자초한 측면이 크다. 끝없이 이어지는 의정 갈등, 벽에 막힌 교육 및 의료 개혁 등 국정 성과엔 의문 부호가 붙었다. 불통과 독선 이미지가 결국 무능으로 수렴되는 게 아니냐는 국민이 많아서 더 문제다. ‘무능 정권 심판’이란 깃발에 표를 몰아준 총선 결과에 합당한 변화가 필요하다.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 형편은 훨씬 아쉽다. 당대표를 새로 뽑는 전당대회는 쇄신과 비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친윤 반윤 비윤 운운에 창윤 타령이 더해졌다. 게다가 한동훈 후보를 비토하려는 ‘김건희 문자’ 파문까지 터져 윤 대통령과 김 여사 이야기만 무성하다. 총선 직후 양남당(영남·강남당)이란 지적에도 중도층과 젊은 세대를 잡으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그들만의 리그’ 속 뺄셈 정치에 빠졌다.
민주당은 22대 국회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다수당의 위력을 과시한다. 국회의장을 야당 단독으로 뽑았고, 법제사법위원장과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장 등을 독식했다. 채상병 특검법, 윤 대통령과 김 여사 관련 특검법, 쌍방울그룹 사건 재수사 특검법 등을 잇따라 발의했다. 특히 이 전 대표나 측근 인사들을 수사한 검사 4명 대상 탄핵소추안은 상식을 뛰어넘는 무리수다. 그 가운데 쌍방울그룹 사건을 맡았던 검사에게 적용한 공용물 손상죄는 압권이다. 술에 취해 화장실 세면대와 벽면에 대변을 발랐다는 취지다. 한술 더 떠 탄핵안이 발의된 수사 검사들을 법사위에서 조사하겠단다. 총선 민심이라지만 독주하라고 준 표가 아니다. 이 전 대표의 대권 도전이 목표라 하더라도 입법 권력의 오만으로 보여선 곤란하다.
윤 대통령은 무능 프레임에서, 이 전 대표는 오만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능과 오만 사이에 국민의 삶이, 대한민국의 미래가 위태롭다. 두 사람이 만나 대화로 풀 일이다. 지난 4월 회담보다 더 생산적으로. 저출산·고령화와 균형발전 등 총선 공통 공약부터 시작하라. 그렇게 신뢰와 협치의 공감대를 이루면 권력구조나 선거제 개편 논의도 불가능한 게 아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목표가 같다면 사법에 맡긴 정치를 복원하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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