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감옥서 탈출하고 싶었다…평생 놓지 못한 ‘치유 투쟁’
- 경남소년학교 출신 故조영수 씨
- 고아원 떠나 자유 찾으려다 감금
- 영화숙 끔찍한 경험이 삶을 지배
- 생계 제쳐두고 노트에 기록 시작
- 어떻게든 인권유린 알리고 싶어
- 증언자로서의 역할하려 했으나
- 결국 이루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
옅게 안개 핀 새벽녘 부산 송정항. 조업하던 어부의 시야로 세상을 등진 채 바다를 떠도는 70대 남성이 포착됐다. 2024년 3월 13일 오전 5시32분, 송정항 동방 0.6해리(1.1㎞) 지점에서 남성은 숨을 거둔 채 해경에 인계됐다. 남성은 전날 아침 손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나섰다. 부인과 자녀들에게 전할 마지막 인사는 편지 속에 담았다. 그간 남편 노릇, 아버지 본분을 다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썼다. 유족은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 앞바다에 그의 뼈를 흘려보냈다. 자택으로 돌아온 뒤, 부인은 남편이 오랜 시간 육필로 빼곡히 채운 노트들을 모두 불태웠다.
부인 황모(69) 씨는 남편이 못내 답답했다. 노트를 없앤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기억이란 감옥에 갇힌 사람 같았다. 아니, 기억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악몽’이라고 부르던 기억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남편은 2000원짜리 노트에 자신의 어릴 적 일을 끝없이 써 내려왔다. “세상이 알아야 한다, 책을 내고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노트를 위해 남편 고(故) 조영수(72) 씨는 밤잠을 줄이고 줄담배를 늘렸다. 그렇게 3년을 집필하고 휴식 뒤 또 3년, 6년을 매진했다.
남편이 노트에 몰입하는 동안 가족의 생계 수단이었던 개인택시엔 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자녀가 중학생일 무렵이다.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갈 시기에 가장이 손에서 생업을 놨다. 황 씨는 노트가 불러 오는 옛날 생각을 떨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황 씨는 갑작스레 떠나간 남편에게서 가엾음과 원망스러움 가운데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몰랐다. 남편은 말년에 몸이 아파 수시로 병원을 들락였다. 노트에 열중하면서도 “가족에게 짐이 되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말하던 그였다. 가뜩이나 노트 때문에 가족에게 못 해준 일이 많았다. 큰돈 들여 치료 받아 가족에게 부담을 줄 순 없었으리라.
▮흉터가 된 시간을 맴돌다
부인과 달리 남편은 옛 기억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으려 했다. 그는 60여 년 전 붙들려 간 장림동의 부랑아 집단수용시설 ‘영화숙’에 현재를 사로잡힌 상태였다. 집단수용시설 피해자 대부분은 참혹했던 공간에서 벗어나고자 피난하듯 전국을 떠돈다. 반면 조 씨는 고향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장림동 주변을 수시로 찾으며 과거의 기억을 되짚으려 했다. 그는 끔찍했던 시간을 겪은 이후, 줄곧 어릴 시절의 ‘흉터’ 주위를 맴돌며 살았다. 잊지 못했고, 잊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삶은 옛 시간이란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1962년 열두 살 무렵 단속차에 실려 그곳으로 끌려갔다. 혹독한 규율과 쉴 새 없는 몽둥이 세례에 혼이 빠졌다. 꼬마 아이 배조차 채워주지 못한 형편없는 식사에 흙을 파먹었다. 친구는 점호 중 말을 했다는 이유로 매질 당해 죽었다. 두 눈으로 죽음을 목도한 뒤부턴 이 지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의식에 자리했다. 뒷산 구덩이에 숨어 어렵사리 탈출에 성공했다.
조 씨가 잡혀간 영화숙을 비롯해 당대 부랑인 집단수용시설은 일종의 사설 감옥이었다. 1962년 전후는 군사정권이 사회 정화라는 허울을 앞세워 사설 감옥들을 양성하기 시작한 시기다. 부랑인 단속이 강화되면서 죄 없는 사람들이 기준도 기약도 없이 갇혔다. 거리를 홀로 배회하면 잡아갔고, 시장에서 밥을 얻어먹으면 짚차에 태웠다.
근본 없는 행정이었다. 법률적 근거는 1975년에야 내무부 훈령 제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 지침’이 제정되면서 형성됐다. 이마저도 오늘날의 사법부는 정당한 절차 없이 자행된 위헌·위법한 지침으로 판단한다.
조 씨는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 참혹한 경험을 말과 글로 옮기고, 이를 모두가 알게 하고자 무진 애를 썼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그가 선택한 방법이었을 터다. 정신분석학은 트라우마적인 사건을 겪은 이가 애써 사건을 기억하지 않고 피하려 할수록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무기력하게 당해야만 했던 그 기억에 잠식돼 결국 삶을 좌초당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심지어 자신을 붕괴시킨 그 사건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현재의 자신을 채우고 구성한다. 정신분석학자 맹정현은 저서 ‘트라우마 이후의 삶’에서 “사막 같은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경험이라는 사실은 비극”이라고 썼다.
▮불가역적 순간과 ‘갱생’
부부는 부산진구 소재 고아원 ‘경남소년학교’ 출신이다. 10대 때부터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사이다. 그런데도 황 씨는 남편이 영화숙에서 모진 삶을 견뎌왔단 사실을 1980년 부부가 돼서야 알았다. 소년 시절엔 분명 자유분방하고 활동하기 좋아하는 남자였다. 말수가 적어지고, 사람과 어울리기 싫어하게 된 건 어른이 돼 머리가 굵어진 영향인 줄로만 알았다. 황 씨는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를 제외하면 남편이 미소 짓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고아원을 떠나 자유를 찾으려다 외려 삶의 모든 것을 철저히 속박당하게 됐다. 그는 고아원 생활이 싫었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궁핍에 시달린 어릴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 9남매와 함께 고향 인천을 떠나 부산에 정착했다. 도저히 자식들 모두를 키울 여력이 없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그와 여동생을 고아원에 맡겼다. 경남소년학교는 지금의 부산진구청 인근, 주한미군 부대 ‘캠프 하야리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했다. 조 씨는 미군을 보며 태평양 건너 미국을, ‘자유의 땅’을 동경했다.
조 씨는 추진력이 강했다. 시설에서 빠져나온 그는 단신으로 서울 홀트아동복지회를 찾아갔다. 미국으로 입양시켜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부산으로 돌아와선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넝마주이 집단과 어울려 서면시장 등에서 ‘슈샤인 보이’(구두닦이)로 지내며 끼니를 벌었다. 단속을 당한 것도 장마철 구두닦이 일감이 줄어들자 시장을 돌며 생활하던 때였다.
‘감옥’에서의 경험은 온 정신에 사무쳤다. 어린 시절 인생을 걸고 울타리를 넘어 추구한 가치였던 자유를 이곳에서 송두리째 빼앗겼다. 노트를 세상에 공개해야 한다고 느낀 계기였을 터다. 감옥을 빠져나온 뒤 조 씨는 다른 사람이 됐다. 당대 국가의 말마따나 ‘감화’되거나 ‘갱생’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몸은 일상을 되찾았지만 정신은 여전히 장림동에 머물렀다. 자유를 동경했던 활기찬 소년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사람을 멀리하는 폐쇄적 인간으로 변모했다. 오로지 영화숙을 언급할 때에만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조 씨의 고아원 동기이자 절친한 벗 A 씨는 “활기차고 밝았던 친구였는데 대인기피증이 의심될 정도로 사람을 멀리했다. 영화숙에서 당한 일을 말할 때만 눈빛을 바꾸고 말을 했다”고 전했다. 조 씨는 영화숙에서 당한 폭력을 고문에 빗댔다고 한다. 친구가 매질에 목숨을 잃었을 때 받은 충격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했다. 다음에 땅속으로 파묻힐 사람이 나일 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는 자유의 몸이 되고 60여 년이 지날 때까지 조 씨의 의식을 지배했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집단수용시설에서의 시간에 수감돼 있었다. 무기수와 같은 처지였다.
▮결국 이루지 못한 뜻
그는 누구도 영화숙·재생원에 주목하지 않을 무렵부터 이 지옥의 시설을 알리려 애썼다. 노트를 들고 언론사에 찾아가 인터뷰하고, 학예사를 만나 구술했다. 2014년 임시수도기념관이 펴낸 학술연구총서 ‘낯선 이방인의 땅 캠프 하야리아’에서 그는 ‘구술자 J’로 등장한다. 보육원과 고아원을 전전하며 겪은 일화들이 나열됐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알리고 싶어 한 영화숙은 ‘그 끔찍한 시설에 감금됐다 탈출했다’는 한 줄의 문장으로만 소개됐다. 총서 주제가 ‘캠프 하야리아’라 내용 상당 부분을 들어내야 했다.
영화숙의 존재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진다는 사실을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당시 그의 증언을 채록한 차성환(전 부산민주공원 관장) 씨는 “조 씨는 자신이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환경을 딛고 잘 자랐다는 자긍심이 보였다”며 “그와 동시에 부당하게 혹독한 처우를 받았는데도 그 같은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에 아쉬워하고 분노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그런 일을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다’는, 증언자로서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노트는 결국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우리 아저씨(남편 조 씨)가 가방끈이 짧다 보니 문장력이 없잖아요. 그러니 글쓰기가 서툴렀는데도 (책 내려고) 여러 사람을 찾아가 자기가 적은 걸 보여주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그러다 세월이 이때까지 흘렀어요. 정말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 했어요. 시도 때도 없이 맞은 이야기, 정신없이 도망쳐 나온 이야기, 눈앞에서 친구가 맞아 죽은 이야기들요. 영화숙이란 곳에서 당한 일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했어요. 죽기 전까지도 출판을 아쉬워했습니다.” 황 씨의 설명이다.
조 씨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숙이란 공간, 그곳에서 몸소 겪은 비참에 결박됐다. 어떻게 해야 한(恨)을 풀고 기억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감옥 이후의 삶, 현재의 삶에 몰입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까. 남은 이들은 떠나간 이를 대신해 이 오래된 질문의 답을 찾고 싶어 한다. “살아생전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멍한 짓 하지 마라. 네 인생 버린다. 여기에 집착하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은 어떻게 되려고 하느냐’. 이런 이야기를 할 땐 눈이 딱 돌아와요. 정신이 딱 돌아와서는 하는 말이 ‘안 된다, 이거는 안 된다’는 거예요. 아마 자기 평생의 ‘그것’이었던 거야. 절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잊을 수 없는 일….”(A 씨)
▮떠난 이를 대신한 치유 투쟁
조 씨는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알아주길 바랐다. 자신을 비롯해 당시 집단수용시설에 억울하게 갇혀 삶의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 있었음을 기억해 주길 원했다. 그런 참혹한 시절을 보냈음에도 자신은 이렇게나 잘 살아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고, 다른 이들 또한 자신의 떳떳함을 알아봐 주길 기대했다. 자신만의 치유 투쟁에 나서왔던 셈이다. 이름 모를 시설에 갇혀 인간 존엄을 짓밟힌 피해생존자 대부분의 심정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피해생존자 그 누구도 어릴 적 흉터를 깨끗이 지우지 못한다.
세월이 지나고 사회가 바뀌면서 과거와 같은 무자비한 집단수용시설은 자취를 감췄다. 옛 형제복지원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영화숙·재생원 터는 경찰서와 운전학원, 공장으로 덮였다. 가해자인 박인근 형제복지원장은 2016년 6월, 이순영 영화숙·재생원장은 1981년 1월 죽었다. 이들 시설의 폭력 행태를 묵인·지원한 군사정부와 그 관계인들도 모두 땅속에 묻혔다. 오직 피해생존자의 트라우마만이 죽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온다. 영영 떠나갈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기억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며 살아야 한다.
조 씨와 같은 치유 투쟁 없이는, 피해생존자는 영원히 자기 삶으로부터의 난민이 되고 만다. 현재를 잠식당하고 옛 기억에서 도망하는 것으로 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 이것이 2022년 12월 결성된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가 결성된 이유다. 협의회는 ‘정말 있었던 일을, 있었던 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기치를 토대로 활동을 개시했다. 언론이 피해생존자를 조명하길 바랐고, 국가가 진상규명에 나서길 요구했다. 잘못 없는 사람에게 국가가 폭력을 가했다는 점이 인정되고, 그 증표로 국가가 국민 앞에 사과하길 고대했다. 이것이 시설에서 죽어간 아이들, 시설을 나오고서도 온전한 삶을 되찾지 못한 이들을 위로할 ‘지연된 정의’로 여겼다.
유족은 평소 바다를 즐겨 찾은 조 씨를 위해 해양장으로 마지막을 배웅했다. 황 씨는 “남편이 자기 뜻을 이루려고 했을 때는 오직 자기 혼자밖에 일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다른 분들이 우리 남편의 원, 그리고 본인들의 원을 이루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영상= 박세종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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