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문자 ‘예송논쟁’을 보며 [김영희 칼럼]

김영희 기자 2024. 7. 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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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문자의 진의를 둘러싼 공방을 이리 미주알고주알 국민들이 생중계 듣듯 해야 할 일인가 싶다. 과정이 어떠했든 명품백 사과는 이뤄지지 않았다. 대통령 부부나 한동훈 후보나 사과를 선거의 유불리로만 따졌지 국민들이 느낀 허탈감과 모욕감이 우선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 공방은 의도치 않게 몇가지 지점을 환기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없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달 25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6·25 전쟁 74주년 기념식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김영희 | 편집인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인 건 윤석열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김건희 여사가 지난 1월 한동훈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당시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명품백 사과 의사를 밝혔다는 문자 내용이 공개된 뒤 연일 충돌이 벌어지는 국민의힘 이야기다.

김규완 시비에스(CBS) 논설실장이 재구성해 공개한 문자를 보면 김 여사의 태도는 사뭇 공손하다. ‘서울의 소리’ 기자와의 통화에서 “내가 한동훈이한테 전달하라 그럴게”라던 거침없는 말투나 최재영 목사가 찍은 영상에서 보이던 다변과는 거리가 있다. ‘한동훈 위원장님’이라고 깍듯이 부른 뒤 송구함→대국민 사과 망설이는 이유→그럼에도 뜻을 따르겠다는 의사 표명 순서로 일목요연하게 내용을 전개했다. 공을 떠넘기는 게 목표였다면, 꽤 점수를 받을 문자다.

이 문자 무시가 한 후보에게 얼마나 타격을 줄지는 미지수다. 이미 1월에도 비슷한 보도가 나왔던 마당이다. 그런데도 지금 상황이 ‘집단 자해극’ 수준으로 치닫는 데는 거듭 수위를 높인 한 후보의 해명 또한 한몫했다.

처음엔 문자에 답을 안 한 이유로 ‘공사 구분’을 말하더니, 다음엔 ‘실제 내용과 좀 다르다’, 그다음은 ‘사과를 하기 곤란하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고 했다. 나아가 대통령의 한국방송(KBS)과의 2월 대담 때도 사과 의견을 전했다며 “저는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가 대통령실의 반대 의견을 강하게 받은 직후 사퇴 요구까지 받은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한 후보에 대한 사퇴 요구 이유가 ‘김경율 사천 논란’이 아니라 김 여사 문제라는 건 누구나 짐작했지만 ‘감히’ 아무도 공식화하지 않았다. 당사자인 한 후보가 이를 확인해준 셈이다.

솔직히 문자 진의를 둘러싼 공방을 미주알고주알 국민들이 생중계 듣듯 해야 할 일인가 싶다. 과정이 어떠했든 명품백 사과는 이뤄지지 않았다. 대통령 부부나 한 후보나 사과를 선거의 유불리로만 따졌지 국민들이 느낀 허탈감과 모욕감이 우선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 공방은 의도치 않게 몇가지 지점을 환기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없지 않다.

우선 무슨 조선 후기 ‘예송 논쟁’처럼 영부인에 대한 예의네 아니네 하는 공방이 21세기 대한민국 정당 안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국민의힘의 고루한 이미지는 한층 강화됐다. 안 그래도 ‘조그마한 파우치’ 표현이나 특검법에 김 여사 이름을 못 쓰게 하는 등 권위주의 시대 같은 일이 국민들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왔던 터다. 예송 논쟁 당시 서인과 남인은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년 입냐를 두고 두차례에 걸친 격렬한 논쟁 끝에 번갈아 서로를 권력에서 몰아냈다. 이를 계기로 그나마 공존에 기반하던 붕당정치가 무너지고 조선왕조가 혼란으로 빠져든 건 주지의 사실이다.

또 하나는 윤 대통령 부부에게 미련을 못 버리던 이들마저 영부인의 ‘국정 개입’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재영 목사 앞에선 김 여사 스스로 ‘통일사업 의욕’을 밝히기도 했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에 극우 유튜버를 대거 초청한 것도 논란거리였지만, 행사에 지인을 부르는 것과 영부인이 정부·여당 인사들과 직접 연락을 주고받는 건 차원이 다르다. 김 여사가 두문불출할 때도 그의 문자나 전화를 받은 정치권 안팎 인사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꽤 퍼졌다. 한 후보는 특히 과거 김 여사와 석달 사이에만 300여차례 카톡을 주고받았던 사이다. 그가 법무부 장관일 땐 한번도 연락이 없었을 것이라고 국민들이 쉽게 믿을까.

문자 공개에 김 여사의 뜻이 어느 정도 반영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전당대회 개입 ‘논란’만으로도 김 여사는 한국 정치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영부인이 됐다. 캄보디아에서, 대구 서문시장에서, 정인이 묘 앞에서 화보처럼 찍은 사진들이 배포될 때마다 그가 에바 페론을 꿈꾸는 것 아닌가 생각한 적 있다. 대통령인 남편보다 더한 인기를 서민들로부터 누리며 ‘아르헨티나의 성녀’라 불렸지만 평가가 극적으로 엇갈렸던 에비타 말이다. 실제 많은 언론이 김 여사가 후드티를 입어도 명품을 걸쳐도 ‘완판’ 기사를 써댔고, 대통령실에서 찍은 사진을 개인 팬클럽 회장이 받아 게재해도 팬클럽 회원 급증 같은 화제나 전했다. 애초 공사 구분이 안 되는 삶을 살아온 김 여사가 2부속실이나 특별감찰관 같은 최소한의 제도도 필요 없다는 무모한 자신감을 키우는 데는 이런 언론들의 행태 또한 일조했다.

보수정당 내부의 핵분열은 사실 ‘그들만의’ 권력 다툼이다. 문제는 앞으로 비슷한 갈등이 반복·격화되며 예송 논쟁처럼 정국을 집어삼킬 게 뻔하다는 것이다. 과제가 산적한 우리 사회가 영부인 논란에 3년을 보낼 순 없지 않은가. 김 여사 스스로 검찰 조사에 앞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 문자가 진심이라면.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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