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급 영화를 집에서 뚝딱! AI가 ‘창작의 민주화’ 이룰까
할머니들이 안개가 자욱한 물가에서 천천히 걸어나온다. 줄지어 황금 사막을 지나 녹색 언덕을 오른다. 그들은 점점 거인으로 성장하더니 나무, 빙하, 산봉우리, 오두막의 모습으로 변한다. 이윽고 구름 위 하늘, 라벤더 꽃밭, 새벽녘 바닷가의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진다.
레오 캐논 감독의 2분짜리 영화 <할머니들은 어디로 떠난 걸까?>의 내용이다. 이 영화에는 인간 배우가 출연하지 않았다. 실사 카메라로 촬영하지도 않았다. 모두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만든 장면이다. 이 작품은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부천영화제)가 신설한 ‘AI 영화’ 국제경쟁 부문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제작 전반에 생성형 AI를 활용한 AI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신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자본 없이 아이디어만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면서 “AI는 창작자를 자본으로부터 해방하는 혁명적 도구”라고 강조했다.
올해 부천영화제는 AI 영화 국제경쟁 부문을 신설했고 AI영화 제작 워크숍을 열었다. 여기엔 6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향후 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꿀 AI에 대한 영화인들의 관심을 증명한다. 올해 12월 부산에선 최초로 AI 영화만을 다루는 ‘부산국제인공지능영화제’가 열릴 계획이다. 눈앞에 성큼 다가온 AI 영화의 현재를 살펴봤다.
“AI는 영화의 혁명”
올해 초 두바이 국제 AI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권한슬 감독의 3분짜리 영화 <원 모어 펌킨>은 배우와 카메라 없이 모든 장면을 AI로 제작했다. 제작 기간은 5일, 제작비는 전기요금 정도였다. 이처럼 AI를 이용하면 영화제작의 비용, 시간, 인력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특히 컴퓨터그래픽(CG)을 비롯해 다양한 시각효과(VFX)가 필요한 호러, 판타지, SF 영화에선 더욱 효과적이다. 고비용 CG 없이도 우주, 화산, 심해 등 실사 카메라 촬영이 불가능한 공간을 구현할 수 있다.
미국 할리우드에서도 이미 AI는 익숙한 기술이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 2>도 배우의 표정과 동작을 ‘나비족’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는 ‘모션 캡처’ 기술에 AI를 사용했다. 개봉 예정인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히어>는 배우 톰 행크스의 외모를 19살로 만드는 ‘디에이징’ 기술을 AI로 실현했다.
AI 영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아직은 실사촬영 영상을 완벽히 대체할 정도는 아니다. 영상 재생시간이 길어질수록 형체가 무너지고 동작이 어색해진다. AI 영화가 주로 상영시간 5분 이내의 단편 영화인 이유다. 하지만 AI의 빠른 발전을 감안하면 이같은 과도기는 당연한 수순이다. 1~2년 내에 60분 이상의 장편 영화도 가능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최근 미국 기업 오픈AI가 개발한 AI ‘소라’가 만든 영상은 실제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수준이 높다.
‘창작의 민주화’ 시대가 온다
기대감과 불안감. AI를 향한 영화인들의 시선은 엇갈린다. 자본으로부터 창작자를 해방하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영화산업 종사자들의 일자리를 파괴하는 재앙일 수도 있어서다. 지난 5일 부천아트센터에서 열린 AI 콘퍼런스에서 AI로 누구나 영화를 만드는 ‘창작의 민주화’에 대해 전문가들이 토론했다.
뉴미디어 플랫폼 ‘오나시스 오닉스’의 기술감독인 매튜 니더하우저는 “AI는 창작의 민주화”라며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누구나 사진작가가 될 수 있었듯이, AI는 영상 미디어에 엄청난 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AI 영상 제작자 단체인 ‘큐리어스 레퓨지’의 강사이자 AI 영화 <어나더>를 제작한 데이브 클라크 감독은 “AI 덕분에 더욱 독창적인 콘텐츠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AI를 통해 모두가 <인사이드 아웃>을 제작한 ‘픽사’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력적인 스토리만 있다면 사실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어요. 창작자는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죠.”
AI가 오히려 창작자와 콘텐츠를 위기에 빠뜨릴 것이란 예측도 나왔다. 이민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AI가 수집한 데이터가 백인 남성 중심으로 편향돼 문화적 차별점들을 반영하지 못한다”며 “독창적이어야 할 창작자가 편향된 데이터에 갇히는 시대가 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AI는 창작의 도구가 아니라 소비의 도구”라며 “영화산업 전반이 하향평준화돼 콘텐츠에 대한 존중이 떨어지고 창작자가 사라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영화 <범죄도시>를 애니메이션 버전으로 보겠다고 AI를 통해 주문할 수도 있겠죠. 개인의 수요에 따라 창작물이 변형되고 소비되는 셈입니다. 이 경우 창작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스러워요.”
AI 영화도 인간의 작품일까
AI 영화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힌다. AI가 인간을 대신해 창작한 AI 콘텐츠의 저작권 문제다. 세계적으로 저작권은 ‘인간의 창작물’에 국한돼 있다. AI 콘텐츠가 저작물로 보호받으며 산업으로 발전하려면 법과 제도의 변화가 동반돼야 한다.
미국 만화 <새벽의 자리야>가 AI 콘텐츠의 위태로운 지위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다. 작가 크리스티나 카슈타노바는 자신이 쓴 소설을 AI ‘미드저니’를 통해 그림으로 만든 뒤 그림을 엮어 만화를 완성했다. 미국 저작권청은 2022년 <새벽의 자리야>의 저작권 등록을 취소하고, 카슈타노바가 작성한 ‘소설 텍스트’와 ‘그림 편집’의 저작권만을 인정했다.
한국에서도 시나리오부터 영상까지 전면 AI로 제작한 영화 <AI 수로부인>이 지난 1월 ‘편집저작물’로 등록됐다. 일반 영화는 ‘영상저작물’로 등록된다. AI가 만든 개별 이미지와 영상이 아니라 인간이 편집한 부분만 저작권을 인정한 것이다.
AI 영화 창작자들은 AI는 창작의 도구일 뿐 인간이 창작을 주도하기 때문에 저작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이브 클라크 감독은 “인간이 창조한 이야기를 AI가 시각화한다면 기본적으로 저작권은 인간에게 귀속돼야 한다”며 “픽사 작품을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지 않고 영화라고 하듯이 AI 영화도 결국 영화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말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 죽고 싶을 만큼 미안하고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