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의 조건… “흙수저라도 스스로 부-품위-교양 갖추면 젠틀맨”[설혜심의 매너·에티켓의 역사]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2024. 7. 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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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부터 귀족인 젠틀맨과
노력 통해 자격 갖춘 이로 분류
이후 내면적 미덕 점점 더 중시
“분노 표출 말고 평정심 유지… 가십 등 품위 없는 대화 삼가야”
영국 귀족 자제들을 그린 19세기 그림(왼쪽 사진).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이기도 한 영국의 소설가, 저널리스트 대니얼 디포는 그의 책 ‘완벽한 영국 젠틀맨’에서 영국의 귀족이나 고위직 인사를 뜻하는 ‘신사(젠틀맨)’가 갖춰야 할 미덕을 소개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다니엘 디포 ‘완벽한 영국 젠틀맨’


‘아직도 조상을 잘 둔 것이 젠틀맨의 기본 요건이다.’ 대니얼 디포(1660∼1731)가 불만 섞인
말투로 쓴 문장이다. 여전히 혈통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젠틀맨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젠틀맨이 젠트리(Gentry)에서 비롯했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젠트리는 영지 소유자로서 비록 귀족은 아닐지라도 지배계급에 포함되는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경제적인 측면에서 젠틀맨의 자격은 직접 일하지 않고 토지 임대료로 먹고사는 계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젠틀맨이 반드시 토지 소유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는 않았다. 귀족 자제 가운데 작위나 그럴듯한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들, 그리고 비록 귀족 출신은 아니지만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도 젠틀맨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정부와 교회, 군대의 고위직 인사도 젠틀맨이라 불렸다. 이처럼 젠틀맨은 경제적 계급이면서 사회적 영향력과 도덕성을 함의하는 호칭이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이 되면 사회경제적 조건보다 내면적 미덕을 중시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디포의 초상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디포는 사후에 출간된 미발표 원고 ‘완벽한 영국 젠틀맨’에서 젠틀맨을 두 종류로 분류한다. 먼저 ‘출생에 의한 젠틀맨’은 태생에 걸맞은 훌륭한 교육을 통해 잘 자란 사람이다. 그런데 ‘젠틀맨으로 키워진 사람’은 미천하게 태어났지만 스스로 부를 쌓고 재치, 감각, 용기, 미덕과 좋은 성정 및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인문학적 지식을 갖추게 된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 모두에게는 ‘신사다움(gentlemanliness)’의 미덕이 요구됐다.

신사다운 태도에서 중요한 요소는 크게 네 가지, 즉 위엄(Dignity), 풍채(Mien), 자신감(Assurance),
편안함(ease)이었다. 이 가운데 당시 풍채라고 불린 개념이 특히 중요했다. 귀하게 보이는 태도, 몸짓, 분위기 등을 포괄하는 말로, 우리말로 ‘귀티가 흐르는’ 정도가 가장 유사한 표현이리라.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귀티가 흐르는 사람이 누구와 함께하더라도 편안한 느낌을 풍겨야 한다는 전제조건이었다. 이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편안해 보이는 젠틀맨은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편안한 상태를 모두가 인지해야 했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 한 방식은 스스로가 매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는 일이었다. 카스틸리오네의 ‘스프레차투라’가 다시 소환되는 지점이다. 즉, 매너 있는 몸가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자체에서 편안함이 배어나오는 단계를 말한다. 이러한 태도나 자세는 단순히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아해야 했다.

젠틀맨이 반드시 갖춰야 할 또 다른 미덕은 침착함 혹은 평정심이었다. 이 당시 영국의 예법서들은 “매너란 스스로 감정을 참는 일로 이루어진다”라고 정의했다. 젠틀맨은 자신의 몸을 잘 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히 어느 상황에 서도 분노를 표출하면 안 되었다. 분노를 드러내는 일은 나약함의 표식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젠틀맨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축소해서 표현해야 했다. ‘불쾌해서 죽는 줄 알았다’라거나, ‘너무 놀라서 정신이 혼미해졌다’와 같은 표현 대신에 ‘과히 달갑지는 않았다’ 혹은 ‘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처럼 에둘러 말하는 것이 영국적인 화법의 범례가 됐다.

이처럼 젠틀맨은 자기들 고유의 화법을 만들어 냈는데, 이때 삼가야 할 내용도 많았다. 우선 사회적으로 품위를 떨어뜨릴 소지가 있는 대화주제를 금지했다. 특히 사교모임에서 사업 이야기를 꺼내는 행동은 엄격하게 금기시됐다. 자신이 ‘장사꾼이 아닌 척’ 해야 하는 우아한 세계에 서 사업 이야기를 하면 영업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양있는 젠틀맨이라면 자기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었다. 매너 있는 여성들은 소소한 집안의 문제들, 옷, 혹은 아이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가십은 일종의 ‘파괴적인 행위’로 인식돼 원칙적으로 금지됐는데, 이 원칙은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또 다른 금기는 오늘날 영국식 매너와는 완연하게 다르기에 매우 흥미롭다. 바로 날씨 이야기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날씨 이야기는 ‘안면 트기 대화(grooming talk)’에 최적화된 주제라서 대화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한다. 특히 영국은 흐리고 눅눅한 기후로 인해 사람들이 날씨에 대한 불평을 달고 살기에 날씨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호응을 얻을 수 있고 심지어 영국인끼리의 동지애를 유발한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18세기 젠틀맨은 사교모임에서 날씨 이야기를 하는 일을 무심하거나 무례한 일로 여겼다. 농업, 무역, 해운, 군수 등 날씨에 영향받는 사업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예법서는 날씨를 대화 주제로 삼는 것은 “수준 낮고, 천박하고, 마치 농부처럼 보인다”라고 규정했다. 날씨를 둘러싼 대화법의 변화는 역사적으로 매너가 유행을 탄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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