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돌풍’보다 강했던 ‘반극우 연대’…또 물먹은 프랑스 극우
의회 다수당 자리를 노리던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 마린 르펜 의원의 꿈이 코앞에서 좌절됐다. 프랑스 현대 정치사에서 극우 세력이 몸집을 키울 때마다 등장했던 시민들의 ‘반극우 연대’가 또 한 번 저력을 발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8일(현지시간) 프랑스 내무부에 따르면 전날 치른 총선 결선 투표에서 RN은 143석을 획득해 3위에 그쳤다. RN은 선거 기간 내내 지지율 1위를 달렸고, 지난달 30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일주일 만에 열린 결선 투표에서 판세가 뒤집힌 것이다. 프랑스 극우의 간판 르펜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당선됐지만 당 대표를 총리로 만들겠다는 야망은 불발됐다.
이런 ‘대반전’은 극우 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 유권자들이 대거 결집한 결과로 풀이된다. 좌파연합과 중도 성향 범여권의 후보들은 1차 투표 후 200여개 이상 지역구에서 후보 단일화를 이뤘고, 유권자들은 “극우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뭉쳤다.
이전에도 프랑스 극우 세력은 권력의 중심부에 다가설 때마다 이 같은 ‘반극우 연대’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르펜 의원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 전 국민전선(FN) 대표가 대표적이다.
아버지 르펜은 ‘극우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인물로, 1972년 RN의 전신인 FN을 창당했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사소한 일”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인종차별 성향을 대놓고 드러낸 탓에 비주류로 취급됐지만, 2002년 대선에선 결선 투표까지 진출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극우 정당의 급성장에 충격을 받은 프랑스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상대 후보였던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이렇게 좌·우파 유권자들이 ‘극우에 맞서 공화국의 가치를 지킨다’는 목표 아래 연대하는 ‘공화국 전선’이 만들어졌고, 시라크 전 대통령은 82.2%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됐다. 1차 투표에서는 3%포인트 차이에 불과했던 두 후보 간 격차를 크게 벌리며 반극우 연대의 저력을 보여준 것이다.
다만 이후로는 공화국 전선의 화력이 점차 약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2017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딸 르펜 의원이 맞붙었을 때도, 2022년 두 사람이 재대결을 펼쳤을 때도 르펜 의원이 패하기는 했지만 2002년 대선과 비교하면 득표율 격차가 크게 줄어 프랑스의 ‘극우 경보’가 이전만 못하다는 분석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번 총선을 계기로 프랑스 시민들이 여전히 극우 세력의 부상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외신들은 평가했다. 르펜 의원은 반유대주의와 결별을 선언하는 등 당의 이미지 쇄신을 꾀해 지난달 1차 투표에서 ‘극우 돌풍’을 일으켰지만, 그 역시 2차 투표에서는 고배를 마시면서 아버지의 전철을 밟은 셈이다.
투표 결과가 나오자 프랑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공화국 전선의 승리를 기념했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상징인 레퓌블리크 광장에 ‘프랑스는 이민자로 이뤄진 공동체’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40세 프랑스인 알리는 “RN은 다른 정책을 언급하지 않고, 그저 외국인과 이슬람 혐오에만 집중했다”며 “프랑스인들이 인종차별에 동의하지 않아 행복하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또 다른 29세 시민은 “선거 이후로도 의회에서는 복잡한 상황이 펼쳐지겠지만, 그건 내일 생각할 일”이라며 “오늘은 일단 기쁜 날”이라고 말했다.
최혜린 기자 cher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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