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불안감, 정의 향한 갈증…TV는 ‘옛날 범죄’ 이야기를 싣고
“어느 날 어린 아들이 살인자가 되어 나타난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하는데요…” 가수 김창완이 라디오 부스를 따라 만든 세트장에서 누군가의 사연을 읊기 시작한다. 방송인 서동주, 전 야구선수 이대호 등이 ‘청취자’가 되어 김창완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지난달 17일 시작한 범죄 예능프로그램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tvN)는 옛 사건∙사고를 라디오 형식으로 들려준다. 해당 사건 관련자들이 사연을 보냈다는 설정으로 직접 출연해 당시의 이야기를 전하는 점도 눈에 띈다. 티브이엔 쪽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때 그 당시 이야기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사고 이후의 이야기, 당시 차마 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최근 범죄를 다룬 프로그램이 쏟아지고 있다. 방영 중인 프로만 10개 남짓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SBS)와 ‘피디(PD) 수첩’(MBC) 등 시사∙교양 프로 단골 소재였던 범죄가 예능의 형식을 차용한 지는 오래됐지만, 최근에는 사건 전달 방식이 다각화되고 있다.
‘이 말을…’처럼 한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드라마 문법으로 긴장감을 주는가 하면,‘풀어파일러’(AXN)처럼 퀴즈 형식을 차용하기도 한다. ‘스모킹 건’(KBS2)에서는 뇌파 분석 등 과학수사기법을 활용하고 ‘그녀가 죽였다’(MBC)에서는 여성 범죄자에 주목하는 등 범죄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채로워졌다. 프로파일러 등 범죄 전문가들이 사건을 설명해주던 것에서 형사(E채널 ‘용감한 형사들’), 탐정(채널A ‘탐정들의 영업비밀’) 등으로 화자도 확장됐다. 범죄 예능을 작업했던 한 방송 작가는 “시사 프로에서는 사건의 전말을 파헤쳤다면 범죄 예능에서는 이미 다 해결된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하느냐가 중요하다”며 “같은 사건을 다르게 보여주려다 보니 형식도 다양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2021년 시작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SBS)의 성공이 촉발제가 됐다. 장도연·장현성·장성규가 특정 사건을 친구에게 들려주는 대화형 콘셉트로 3년 넘게 인기를 얻고 있다. 마치 소셜미디어(SNS) 등에서 본 화젯거리를 “너 그거 아냐”며 지인에게 전하는 느낌을 시청자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최삼호 피디는 “기획 당시에는 실제 일어난 범죄를 너무 가볍게 전달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는데, 이 프로그램이 사랑받으면서 이후 범죄를 다각도로 들여다보는 시도에 주저함이 없어진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에는 라디오 드라마를 만드는 듯한 ‘듣고 보니 그럴싸’(JTBC)가, 지난 2월에는 범죄를 처음으로 버라이어티에 접목한 유재석, 블랙핑크 제니 등이 출연한 ‘아파트 404’(tvN)가 방영되기도 했다.
‘꼬리에…’와 ‘용감한 형사들’은 시즌3이 방영되는 등 범죄 예능은 대개 타율이 좋다. 수년 전만 해도 우려의 목소리가 컸던 범죄 예능이 인기를 끄는 데는 데이트 폭력, 무동기 범죄 등 누구나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한몫을 했다. 여기에 최근 나온 범죄 예능들은 사건 전달에서 나아가 분석과 예방을 통해 재발 방지와 대책 마련 등에 집중하고 있다. ‘풀어파일러’의 황교순 책임피디는 지난 3월 시즌4 제작발표회에서 “우리 프로의 목표는 범죄 예방이다. 시청자들도 퀴즈를 같이 풀면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길 바란다”고 했다.
과거를 통해 오늘을 성찰하는 의미도 있다. ‘이 말을…’은 성적 집착 사회와 어른들의 무관심(1화), 건설사 부실 시공(2화) 등 지금도 계속되는 문제들을 짚었다. 티브이엔 쪽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사건 위주로 선택했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과거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다시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법 정의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다는 대중의 의구심도 범죄 콘텐츠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이유”라고 짚었다.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사건인 ‘삼례 나라슈퍼’ 사건은 ‘그것이…’(2014년, 2020년)부터 ‘이 말을…’(7월1일)까지 여러 프로에서 소개됐다. 지난 2월에는 심신미약으로 감형되는 등 뉴스 속 답답한 사건을 출연자들이 배심원이 되어 다시 판결을 내려보는 프로(SBS ‘판사들의 에스오에스(S.O.S)-국민 참견 재판’)가 방영되기도 했다.
코로나 19 이후 스튜디오물이 익숙해졌고 제작비가 적게 들어 가성비가 좋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유튜브 콘텐츠로 요약해서 내보내기 좋아서 화제성도 끌어올릴 수 있다. ‘꼬리에…’에서 다룬 지존파 사건은 1천만건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크라임신’ 등 추리 예능이 인기를 끄는 요즘 화두에도 잘 맞다.
하지만 점점 프로그램이 자극적으로 변하고, 가해자를 미화할 수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녀가 죽였다’에서는 인천 초등생 살인 사건을 다루면서 구체적인 묘사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범죄 예능이 피해자에게 허락을 맡고 방송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에서 2차 가해도 우려된다.
‘이 말을…’1화에서 어머니를 흉기로 살해했던 아들이 처음으로 방송에 출연해 심경을 밝힌 것을 두고도 여러 의견이 나왔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제작자들은 피해자에게 다시 한번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며 “가뜩이나 신뢰도가 낮은 공권력과 사법부에 관한 불신을 더 확대하면서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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