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집단살인’까지…“밀레이가 혐오범죄 부추겨”
아르헨티나에서 동성애 여성 3명이 한꺼번에 60대 남성의 방화로 숨진 사건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극우 정치인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취임 이후 늘어난 혐오·증오 범죄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온다고 시엔엔(CNN) 방송이 7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사건은 지난 5월 6일 새벽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택에서 일어났다. 당시 방을 공유하며 함께 생활하고 있던 동성애 여성 4명이 자고 있던 이곳에 한 남성이 몰래 침입해 인화성 물질을 던져 넣었다. 여성 한 명은 불길이 치솟은 현장에서 숨졌고, 다른 두 명도 병원에 옮겨졌으나 며칠을 넘기지 못했다.
여성 한 명만 병원에서 몇 주 동안 치료를 받은 끝에 살아남았다. 경찰은 “사고 당시 그의 파트너인 다른 여성이 이 여성을 몸으로 덮쳐 보호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범인은 같은 건물에 사는 60대 남성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이 남성의 범행 동기가 불투명하다며 경위를 조사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성소수자 인권 관계자들은 “피해자들이 성정체성 때문에 공격 대상이 된 것이 분명하다”며 전형적인 혐오·증오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특히 “평소 사회적 소수자를 겨냥해 막말을 서슴지 않는 밀레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취임한 이후 혐오·증오범죄가 늘었다”고 비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옴부즈맨사무소의 차별금지연구소 대표인 마리아 라치드는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차별적인 언사와 증오발언을 일삼는 정부 고위인사들이 늘어났다”며 “그들의 행위가 일상에서 차별과 폭력의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의 국립 성소수자 증오범죄 관측소 등 여러 인권단체에 따르면 지난해 대선 당시 밀레이 당시 후보는 성소수자 집단을 향해 혐오·증오발언을 쏟아내 비판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11월 대선을 앞두고 인터뷰에서 “동성 결혼을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동성 결혼을 수간에 비유했다. 지난해 12월 취임 이후엔 성소수자를 보호하는 정책을 하나둘 폐기했다. 정부 내에서 성 중립적 용어 사용을 금지하고 여성·다양성부를 인적자본부 아래 기구로 격하했으며, 국립차별반대 기구를 없애버렸다.
밀레이 대통령은 이런 조처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 기구 축소 차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인권 관계자들은 이런 조처들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문화를 복원하고 심지어 성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성소수자연맹(FALGBT) 회장 출신인 에스테반 파울론 의원은 “힘 있는 사람들이 혐오·증오발언을 하면 사회에 성소수자를 공격해도 괜찮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며 “분명히 증오발언 뒤에는 실제 행동이 따른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지난 5월 동성애 여성 3명이 희생된 방화 사건을 혐오·증오범죄가 아닌 일반 살인죄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사건 직후 대통령실 대변인 마누엘 아도르니는 범행을 비판하면서도 “특정 그룹에 대한 공격이라고 정의하고 싶지 않다”고 증오범죄 관련성을 부인해, 성소수자 인권단체의 비판을 받았다.
아르헨티나는 한때 성소수자 보호에 앞선 선도국가였다. 2010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한 나라가 됐으며, 2021년엔 역시 세계 최초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을 인정해 여권같은 공공문서 성별란에 ‘엑스’(X)라고 적어넣는 걸 허용했다.
실제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시각은 대체로 진보적이다. 지난 5월 산안드레스 대학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2%가 동성결혼을 지지했고, 70%가 성전환자의 차별을 막기 위한 정책을 지지했다. 또 79%가 학교에서 포괄적으로 성 관련 교육을 하는 것에 대해 찬성했다.
성소수자 인권단체는 밀레이 대통령의 극우 정권 등장 이후 이런 성과가 하나둘 허물어질까 두려워하고 있다. 파올론 의원은 “차별, 괴롭힘 등을 막을 여러 법안을 인권단체들과 논의하고 있다”며 “성소수자 공동체에 대한 공격을 줄이려면 성소수자의 목소리와 요구가 더 많은 영역에서 증폭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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