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종의 세계의 창 <6>] 유라시아 정체성으로 국익 적극 투사하는 푸틴 5기 대외 정책

김홍종 고려대 특임교수 2024. 7. 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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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치명적인 무기를 공급한다면 그것은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셔터스톡

“그동안 우리는 한국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어요. 그런데 지금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관계를 파괴할 겁니다. 우리가 북한과 군사 협력을 재개한다면 당신들 행복하겠습니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한창 계속되던 2022년 10월 27일(이하 현지시각)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발다이클럽 연례회의 마지막 날 저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필자의 다른 질문에 답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여부에 대한 러시아 측의 우려가 최고지도자의 입을 통해 최초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에도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공급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 표명은 계속됐다. 올해 3월 선거에서 87.28%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어 5월 7일 다섯 번째 임기를 시작한 푸틴 대통령은 6월 20일 북한과 베트남 순방을 마무리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만약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가는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한국산 무기의 전장 투입은 전세를 바꿀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 될 것이다.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물리적 거리로 볼 때 양국의 군사 협력 여부는 지정학적 고려가 개입되기보다는 단순히 우리 군수산업의 경쟁력을 알려주는 징표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연계는 그들이 구사하는 대외 정책에서 함께 다루어야 할 지정학적 고려 사항이 된다. 왜 그럴까.

유럽 변방 국가에서 유라시아 국가로

17세기 중반 동시베리아까지 진출한 러시아제국은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면서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했다. 하지만 발트해, 모스크바 일대와 우랄산맥의 서쪽을 주 활동 무대로 삼아 온 역사적 경험에서 보면, 러시아제국이 스스로를 유럽 국가라고 생각한 것은 크게 이상하지 않다.

대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이라고 불리는 독소전쟁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한 소련은 이후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소련은 비록 러시아에 의한, 러시아를 위한, 러시아의 국가였지만 1991년 연합 해체 후 생겨난 러시아가 소련을 ‘다시 돌아가야 할 국가의 원형’으로 삼지 않았던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오히려 탈자유주의적 전통주의 기반에서 과거의 러시아제국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다. 변방부 유럽 국가라는 종래의 인식이 1990년대 가장 힘든 시기를 거친 러시아의 주된 자기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러시아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그리고 2000년 푸틴 집권 후 분명하게 자국을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 우선 러시아를 유럽 국가가 아니라 유라시아 국가로 인식했다. 푸틴의 주장에 따르면 소련 해체 후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는 일방적 호의에 대한 서방의 무시, 이에 따른 러시아의 분노와 좌절로 점철된 것이었다. 미국 중심의 ‘일극 국제 질서’ 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러시아는 다극화된 국제 질서를 지향하고 독립국가연합(CIS) 국가와 협력을 확대하며 1990년대 혼란기에 시작한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협상을 꾸준히 진행하는 등 세계경제로 적극 편입하고자 했다. 초강대국은 아니더라도 강대국으로서 지위 회복을 목표로 했다.

2000년대 당시 러시아의 외교정책 개념(Foreign Policy Concept)을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친서방주의에서 전방위 외교를 지향하는 유라시아주의로 옮겨간다. 당시 러시아는 자국을 안보리 상임이사국, 주요 8개국(G8)과 주요 국제기구와 정부 간 대화의 주요 참여국임을 인식했다. 서방과 연결 끈을 놓지 않고 자국을 G8으로 인식했던 것은 지금 러시아가 브릭스(BRICS)에 강한 소속감을 갖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김흥종 고려대 특임교수서울대 경제학 학·석·박사, 옥스퍼드대 명예펠로, 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

대외 정책의 대상 지역 우선순위 크게 조정

2023년 3월에 발표된 외교정책 개념은 지난 20여 년간 러시아가 추구해 온 자기 정체성의 변화와 이에 따라 새롭게 정의되는 대외 정책의 기조를 잘 표현하고 있다. 러시아는 자국을 1000년 이상 독립국으로 이어져 온 전통, 유럽 및 유라시아 문화와 깊은 역사적 유대, 다양한 민족과 언어를 러시아라는 국가 문명으로 통합하는 연방국이자, 유라시아와 유럽 및 태평양 국가로서 자국을 인식한다. 이를 기반으로 러시아는 국제법에 기반한 다극적 국제 질서를 옹호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2023년 문서에서 나타나는 지역 우선순위다. 과거 서방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과는 크게 다르게 러시아는 근외 지역(Near Abroad), 북극, 유라시아대륙· 중국·인도, 아·태 지역, 이슬람 세계, 아프리카, 중남미와 카리브해, 유럽, 미국과 여타 앵글로·색슨 국가, 남극의 순으로 우선순위를 정의했다. 러시아와 직접 연결되는 CIS 등 주변 지역을 최우선시하고, 다극적 질서를 옹호하는 세력과 연대를 선호하는 것이다. 앞으로 6년 동안 이어질 푸틴 5기는 새롭게 정의된 정체성을 바탕으로 대외 정책을 구사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푸틴의 러시아와 평화 공존을 위해 지혜 모아야

러시아는 14개국과 인접해 있으면서 필연적으로 지정학적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대외 정책을 구사한다. 개별 국가와 양국 관계는 러시아의 인접국 정책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는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동시에 여러 개의 공을 저글링하는 듯한, 또는 연립방정식을 푸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보면 북한과 우크라이나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러시아 입장에서는 같은 전략을 사용하는 같은범주의 국가다. 러시아가 북한을 가까이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하다.

푸틴 대통령은 임기 시작 후 중국을 제일 먼저 방문했다. 전쟁 상황에서 중국의 협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대외 정책 순위에서도 우선순위가 높은 나라다.

6월 중순 북한과 베트남 순방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과 특수 관계에 있는 두 나라 방문을 통해 중국을 뒷마당에서 견제하고, 미국과 한국 등 인도·태평양 국가들에 이 지역의 안정과 균형을 위태롭게 할 러시아의 존재감을 상기시켰다. 과거 러시아제국과 현재 러시아연방의 국경선을 비교해 보면 서쪽 국경선이 더 유동적이어서 유럽의 불안이 일견 이해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안정적인 동쪽 지역에서 북한 및 베트남과 군사적, 경제적 연대 강화는 서쪽에서 현상 변경을 바라는 러시아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주된 목표의 반대쪽을 먼저 치는 공격 전술)를 떠올린다.

19세기와 20세기 초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으로 나타났다. 영국은 러시아의 대서양 진출을 억제하면서 크리미아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심지어 한반도 남해의 거문도에서까지 러시아와 대결했다. 이제 세계는 30년 장기 집권을 바라보면서 빌 클린턴과 자크 시라크를 생생히 기억하고 국제 정세에 해박하며, 현상 변경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한반도를 포함한 어디서도 국지전과 전술핵 사용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노회한 정치인과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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