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파워 인터뷰음악계 노벨상 탄 작곡가 진은숙] AI가 작곡하는 시대에 연필로 악보 쓰는 이유

김지수 마인즈 커넥터 2024. 7. 8.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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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숙 작곡가서울대 작곡, 함부르크대 음대 석사, 현 통영국제음악제 예술 감독, 전 독일 베를린공과대 전자음악스튜디오 작곡가, 전 베를린 도이체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 작곡가,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상임 작곡가, 전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예술 감독,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기획자문역 사진 구본숙 사진 작가

지난 4월 벚꽃이 눈발처럼 흩날리는 날, 진은숙을 만났다. 출렁이는 흑발, 검은 마스카라가 번진 눈매, 드넓은 광대뼈…. 이국적인 여성이 낙화를 뒤로 한 채 호텔 로비에 홀로 앉아 있었다. 서울시향 황금기 시절(정명훈이 예술 감독으로, 진은숙 상임 작곡가로 일하던 꿈같은 시절)에 처음 만났으니, 7년 만의 해후다.

‘별들의 아이들의 노래’라는 대작을 정명훈 지휘로 한국 초연하고, 영국 로열 오페라단을 위해 ‘거울 속의 앨리스’를 쓰던 50대의 진은숙도 웅장했는데, 60대의 그는 더 멀리 나아갔다.

올해 1월 독일 에른스포지멘스 재단과 바이에른예술원은 진은숙을 지멘스 음악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클래식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지멘스 상은 작곡, 지휘, 기악, 성악, 음악학 분야를 통틀어 매년 한 명을 수상하며, 인류 문화에 대한 기여도가 수상 기준이다. 카라얀, 번스타인, 메시앙 등이 역대 수상자이며, 아시아인으로서는 진은숙이 처음으로 감격스러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진은숙의 곡은 상상적 모호함과 구조적 정교함, 유동성과 안정성, 신비로움과 화려함 사이에 있다.” 바이에른 예술원 회원들의 심사평은, 일찍이 그를 알아봤던 베를린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 사이먼 래틀의 말을 상기시킨다.

“바흐의 곡을 동시대 현대 작곡가의 곡처럼 연주하는 것, 진은숙의 곡을 과거 대가 작곡가의 곡처럼 연주하는 것이 베를린 필의 목표”라고 사이먼 래틀은 음악계에 진은숙의 위상을 공표했다.

그렇게 절정에 올라 “클래식은 너무 늙었고 현대음악은 너무 젊다”는 우리의 편견을 일거에 깨뜨리는 진은숙. 63세의 그는 여전히 기백이 넘쳤다. 막 ‘순간의 영원’이라는 테마로 열린 통영국제음악제 예술 감독 임무를 수행한 뒤였고, 과학계의 파우스트를 다룬 새로운 오페라 대작을 쓰느라 뇌가 반쯤 열린 상태였다. 초신성이 폭발 중인 눈빛이었다.

우리가 마주한 서머셋팰리스서울 객실 창밖엔 멀리 경복궁의 검은 기와가 가지런했고, 거리엔 추락한 분홍 꽃잎이 수북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차 안에서 생황 협주곡을 듣고 왔다. 고전과 미래가 뒤섞인 메탈릭한 서사가 쏟아져서, 영화 '콘택트'와 '듄'을 만든 드니 빌뇌브 감독의 SF 영화와도 잘 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소 지으며) 그런데 영화음악은 클래식 작곡하고는 완전히 다른 장르다. 굉장히 빠른 작업 스케줄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런 걸 맞출 수는 없다. 다만 내 작품 중에 맞는 걸 가져다 쓰는 건 반대하지 않는다. 특히 생황은 소리 자체가 단순하고 이국적이라 어울릴 것 같다.”

현대음악은 '아름답다'보다는 다른 차원의 형용사를 요구하는 것 같다. 특히 진은숙의 사운드는 음표 하나하나가 낭비 없이 웅장하다. 여하튼 지멘스 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은 언제 들었나.

“(심상하게) 지난해 여름, 베를린 집에서 곡을 쓰고 있었다. 휴대전화로 통화를 거의 안 하는데, 모르는 번호가 떴다. 하도 전화를 안 받으니 ‘전화받아라’는 이메일도 도착했다. ‘위원회에서 마지막 회의를 했는데 당신이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내용이었다.”

지멘스 상은 통보를 받고도 6개월간 비밀에 부쳐야 한다던데.

“핀란드에서 받은 시벨리우스 상은 1년 전, 덴마크에서 받은 레오니소닝 상은 거의 2년 전에 알았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다 공연 스케줄이 몇 년 단위로 미리 짜여 있으니, 수상자에겐 일찌감치 통보한다. 남편(마리스 고토니)한테만 알렸는데, 연신 베리굿, 베리굿…. 상금 받으니까 좋아했다. 하하.”

김지수 마인즈 커넥터(Minds Connector)전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위대한 대화’ 저자

시벨리우스 상, 레오니소닝 상을 탈 때처럼, 지멘스 상도 진은숙이 최초의 아시아인 수상자다. ‘상은 운일 뿐, 좋은 작품을 쓰는 게 자신의 일’이라지만, 시기마다 상을 받지 않았다면 스스로 ‘벌레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창작의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당신을 생각하면 늘 '이상한 나라의 진은숙'이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2007년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역동적 고상함이 자동 재생된달까. 왜 진은숙에겐 항상 무국적, 스펙터클, 꿈이라는 이미지가 따라 나올까.

“나는 내 작품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다. 일단 내 작품에 한국적이라거나 민족적 지향이 없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음악은 지금 우리의 삶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판소리나 민속음악은 생동감이 있지만, 무엇이 한국적이냐고 하면 딱 정의하기 힘들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대음악은 뭐라고 정의하나.

“나는 내 작품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다. 일단 내 작품에 한국적이라거나 민족적 지향이 없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음악은 지금 우리의 삶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판소리나 민속음악은 생동감이 있지만, 무엇이 한국적이냐고 하면 딱 정의하기 힘들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미궁'을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황병기, 백남준, 윤이상, 진은숙 모두 코스모폴리탄이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현대음악을 했다고 봐도 될까.

“그렇다. ‘미궁’은 지금 들어도 잘 만든 음악이다. 서양음악을 가야금으로 세련되게 풀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오리지널은 백남준 선생이다. 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걸 했다. 음악적인 면으로는 전통을 부수는 플럭서스 사조의 흐름을 따라갔는데, 비디오아트는 완전히 그만의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게 한국적인 거다. 그래서 나는 해외에서 한류(韓流) 음악을 자랑할 때도 K팝 스타만 따로 띄우지 말고 윤이상, 백남준, 정명훈의 계보로 서두를 열면 좋겠다고 한다.”

한류의 맥을 그렇게 본다면, 클래식 작곡가 입장에서는 좀 외로울 것 같다.

“그렇다. 한국 출신 창작자의 딜레마가 있다. 유럽에서 난 이방인이다. 수용되고 인정받기까지 갖은 애를 써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도 홈그라운드의 튼튼함이 없어 좀 쓸쓸하다(웃음).”

클래식 연주자는 대중의 관심을 받지만, 작곡가는 접근도가 떨어지니 더 힘들다고 했다. 진은숙은 1962년 가난한 개척 교회 목사 집안에 네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 예배 반주를 맡았고, 근처 예식장에서 결혼식 반주 아르바이트를 했다.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과 축가 반주를 하면서 50원을 받았다. 당시 한 끼 식사 비용이 20원인 것에 비하면 큰돈이었다. 레슨을 받는 것은 꿈도 못 꿨던 터라, 독학으로 음악 이론과 대위법을 공부했다. 그녀의 열정을 헤아린 중학교 선생님이 작곡을 권하며 말했다. “너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될 거야.” 서울대 음대에서 그를 가르쳤던 강석희 교수도 당시 진은숙에게 비슷한 예언을 했다. “네가 작곡한 곡은 곧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게다.”

대학 시절 진은숙은 바흐의 첼로 모음곡 ‘프렐류드’를 딱 한 번 듣고 오선지에 그대로 옮겨서 동기생들을 절망시키기도 했다. 24세에 그는 독일 함부르크대 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작곡가로서 어떤 소리를 추구하나. 매번 작품이 야심만만하고 스펙터클해서 에너지 소모가 크겠구나 싶었다.

“전에 없었던 다른 구조, 다른 세상을 추구한다. 완벽하다는 착각으로 곡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 난 늘 불완전하다. 그런데 그게 또 나의 문제다. 몇 개로 사이즈가 작은 소품을 쓰면 내가 나를 인정을 안 한다. 항상 맥시멈(maximum)을 다해 소리를 질러야 내 존재를 알아주는 그런 세상을 살아오다 보니⋯. 그런데 이번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비올리스트 앙투안 타메스티가 연주하는 걸 들으니 한 음 한 음에 우주가 다 들어 있었다. 창작도 저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날 좀 봐달라'는 아우성으로 웅장한 스케일이 나왔다는 건가.

“그런 셈이다. 유럽이 대개 그렇지만, 독일사회도 외국인에게 관대하고 포용적으로 보여도 어느 수준에 이르면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폴란드에서는 80년대부터 위촉을 받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 1990년대부터 작업하고 CD를 냈어도, 35년 살았던 독일에서는 쉽지 않았다고 했다.

진은숙 작곡가 사진 구본숙 사진 작가

언제 그 선을 넘어 인정받았다고 느꼈나.

“몇십 년 동안 서서히 그렇게 됐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지금은 나아졌지만, 아시안이 유럽의 주류 음악계에서 활동하고 인정받는 건 쉽지 않다. 그들의 자긍심에 도전하지 않는 카테고리. 예를 들어 민속적인 장르라든가, 여성 작곡가로서의 스토리텔링 같은 이슈로 맞추길 바란다. 그런데 나는 그 길을 거부하고 그냥 음악으로 정면 돌파했다. 지휘자 켄트 나가노나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사이먼 래틀 같은 이들이 내 작품을 연주하고 높이 평가하니까. 15년 정도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 거다.”

자신들의 고유 영역에 거침없이 새로운 음표를 꽂아 넣는 아시아 여성, 그것도 소품이나 액세서리 정도가 아니라 소리의 근본을꿰뚫어 현대적인 대작을 내놓는 진은숙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험의 시간이 너무나 길었던 것 같다.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곡을 쓰면서 누가 바깥에서 나를 인정하고 안 하고 성공하고 안 하고가 중요하지 않게 됐다. 단련이 됐달까. 지금도 나는 내가 어떤 작품을 쓰느냐만 중요하다.”

당신의 영혼 저장고엔 무엇이 들어 있나.

“복잡하다. 나는 내면에 소용돌이가 많은 사람이라…, 지금은 또 2025년에 완성할 오페라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지금도 연필로 작곡하나.

“그렇다. 몸을 써서 음악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컴퓨터로 악보를 만드는 행위를 나는 상당히 위험하다고 본다. 너무 쉽게 음표를 찍을 수 있으니까. 음표를 그린다는 건, 연필로 한 음 한 음 생각하고 결정하고, 쓰는 순간 어떤 에너지를 느끼고 다음 음을 쓸 때까지 생각하는 거다. 그만큼 시간이 걸리는 숙고의 과정인데, 그걸 컴퓨터로 하면 아주 쉬워진다. 어떤 사람은 컴퓨터로 해서 그걸 또 복사해서 붙이고 짜깁기하고 즉석에서 들어보더라고. 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자리에서 결정하고 수정한다는 게. 하여튼 끔찍하다.”

손바느질하듯 악보에 음을 새겨온 고단한 ‘음표 노동자’가 몸서리를 쳤다.

지금은 인공지능(AI)이 대중의 취향에 맞춰서 히트곡도 쓰는 시대다.

“(얼굴을 찡그리며) 상당히 위험하다. 피아노도 로봇이 치면 더 정확하게 연주한다. 연주도 작곡도 한 사람의 정신세계와 경험이 농축돼서 나오는 건데, AI가 경험이 있나. 데이터나 프로그래밍은 진짜 같은 가짜만 만들어낸다.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알고리즘을 입력해서 50가지 이상의 컴퓨터 옵션을 믹스한 작곡가가 성공한 사례가. 그런 곡들은 퍼스널러티(personality)가 느껴지지 않아서 금방 딴생각이 든다. 연주는 허수아비가 하고 작곡가는 진작에 떠났다고….”

악보는 당신에게 얼마만큼 중요한가.

“중요하다. 나는 직접 쓰니까. 내 인생이 살아온 시간이 다 거기 투영돼 있다. 악보가 불타 없어지는 악몽도 꾼다. 지금은 다 카피(copy)가 되니까 괜찮지만, 스트라빈스키 시대만 해도 지휘자가 원본을 가지고 지휘를 하니 유실되면 끝. 작품이 소멸하는 거다.”

어떤 음을 만들어낼 때 가장 흥분되나.

“창작하면서 흥분되는 순간은 없다. 이쪽 길로 잘 풀릴 것 같아서 시작하면 어느새 답답한 미로를 만나고, 다음 장 쓸 때는 또 잠깐 잘됐다가 저쪽 길로 가면 다시 힘들다.”

종교는 있나.

“무신론자다. 베토벤도 무신론자였다. 바흐는 교회 음악을 많이 했지만, 그 당시 독일에 기독교 분위기가 강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예술가의 일은 자기 학대와 믿음 사이에 끝없는 균형잡기다.”

슬럼프는 언제였나.

“인생 전체가 슬럼프였다고 보는 게 맞다.”

무엇이 두려운가.

“두렵진 않지만 유감이다. 나이가 들면서 창작의 에너지가 떨어질까(웃음). 여든 살이 넘어서도 호랑이처럼 피아노를 치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처럼, 그 터치, 그 위력을 나도 유지하려면 노력밖엔 없다. 점점 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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