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98>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흔들리며 한 발 더, 비틀거리며 한 뼘 더

김규나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2024. 7. 8.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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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스틸컷. 사진 소니 픽처스 릴리징 브에나 비스타 영화

‘나 지금 잘살고 있니?’ 불현듯 의심이 엄습할 때가 있다. 밤새 뒤척이다 눈을 뜬 아침. 날마다 다니는 똑같은 길, 매일 만나는 비슷한 표정들, 무한히 반복되는 과중한 업무, 조금씩 어긋나는 인간관계가 가슴을 짓눌러온다. ‘이 모든 게 내가 원한 거였다고?’ 자문하는 순간, 단단하다고 믿었던 발밑이 흔들린다.

“열정이나 희망이 느껴지지 않아.”

오래 꿈꾸었던 저택, 세상이 부러워하는 직업, 근사한 배우자와 멋진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는데도 리즈는 행복하지 않다. 내일이면 나아지겠지, 참아보아도 감정의 변덕이라 하기엔 우울이 너무 깊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배우자조차 힘이 되기는커녕 쳐다만 봐도 숨이 턱 막힌다.

“계속 이렇게 사는 건 죽음보다 잔인해.”

어떤 사람들은 호강에 겨운 투정이라고 비웃는다. 만족하고 감사할 줄 모른다고 비난한다. 맞는 말이다. 무덤 같은 평온과 당연해진 풍요는 곧잘 죽음보다 깊은 권태로 변질된다. 그녀를 옭아맨 절망감도 성공과 행복 위에 슬어버린 회의와 불안이란 녹이다. 한때 그토록 반짝이던 성취와 만족은 언제부터 빛을 잃고 시시한 일상에 함몰돼 버렸을까.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친구는 삶의 경지에 이른 도인처럼 달래지만, 리즈는 달관을 가장한 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다 죽긴 싫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난 나를 찾고 싶어.” 그녀는 소리친다. 슬픔이 싫다면 슬픔을 떠나야 한다. 지금의 내가 밉다면 현재의 나를 바꿔야 한다. 오늘과 다른 내일을 바란다면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야 한다.

“우린 서로를 떠나야 변할 수 있어.”

그녀가 바란 건 적극적인 변화다. 누군가가 바꿔주겠지, 시간이 치유해 주겠지, 하는수동적이고 나태한 기다림 대신 불행의 늪을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힘껏 몸부림친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그녀의 고통을 이해 못 하는 남편이었다. 그녀가 원한 이별이었지만 힘든 과정이었고 몸도 마음도 아팠다.

“두렵지만 한번은 무너져야 해.”

변화와 치유가 꼭 커다란 배낭을 메고 근사한 해외여행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멀리, 최대한 낯선 곳에 자신을 던져놓고 싶었던 리즈는 여권을 챙겨 들고, 운동화 끈을 힘껏 묶고 일어선다. 익숙한 환경을 떠나려면 굉장한 용기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예상치 못한 길에서 또 다른 길이 이어지리라, 그녀는 믿었다.

“식욕과 의욕, 모든 열정을 회복하고 싶어.”

그녀는 1년간 미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인도로, 다시 발리를 여행한다. 이국적인 장소에서 새로운 인연과 낯선 시간을 보내며 리즈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다이어트한다고 먹고 싶은 욕망을 얼마나 자주 외면해 왔는지를,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데 한없이 게을렀다는 것을, 매일 똑같은 사람들 속에서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를.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신은 완벽한 인간을 기대하지 않아.”

그녀는 이방인의 언어를 익히고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 명상도 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잠이 쏟아졌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 온갖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왔다. 마음이 가벼워졌나 싶으면 모기가 달려들어 육신을 괴롭혔고, 묵언 수행을 시작하면 잊었던 말들이 꾸역꾸역 목구멍을 밀고 올라왔다.

“개 키우는 사람은 그 개를 닮는대.”

그래도 리즈는 깨달았다. 그녀는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동화되는 성격이었다. 맛있는 걸 좋아하는 남편과 살 땐 좋아하지도 않는 요리를 하며 행복하다고 착각했다. 이혼 후 새로운 연인을 만났을 때는 남자와 똑같은 스타일의 옷을 찾아 입었다. 그가 웃으면 따라 웃었고 그가 외면하면 버려진 것 같아 울었다. 사랑하면 할수록 자신이 닳아 없어졌다.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그토록 잦은 이별도, 이토록 힘든 방황도 없었을 텐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스틸컷. 사진 소니 픽처스 릴리징 브에나 비스타 영화

“모든 건 끊임없이 변하면서 발전해.”

그녀가 미워했던 사람, 실망했던 대상은 남편도 아니고, 잠시 만났다 헤어진 애인도 아니었다. 고통의 원인은 리즈, 자신이었다. 그녀는 미안했던 마음, 서운했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미숙했던 과거를 용서하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려 준 자기, 마음 한구석으로 작게 밀어냈던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행복하지? 몸 안의 간도 웃고 있지?”

발리에서 만난 주술사가 물었을 때 그녀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애인과 사랑도 잘하고 있어?” 하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그녀는 펠리프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애써 되찾은 삶의 균형이 또다시 무너지진 않을까, 겁내고 있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미국의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쓴 동명의 자전적 에세이를 원작으로 한다. 리즈가 펠리프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고 동화 같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결말과 달리 작가의 실제 삶은 ‘왕자님과 결혼한 공주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와는 거리가 있다. 이후에도 여행 전과 다름없이 이별과 만남을 반복했다는 그녀의 관련 기사를 접하면 살짝 배신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혼란의 연속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자 작가의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주제다. 깨달음은 영원하지 않고 행복은 견고하지 않다. 한번 찾은 마음의 평화와 삶의 균형이 한결같이 유지된다면 인생은 얼마나 쉽고 단순할까. 모두가 신이 되지 않을까.

“때론 균형을 잃겠지만, 그건 더 큰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야.”

중심을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무너지고, 깨우쳤다고 자각하는 순간 흩어진다. 살아간다는 것은 흔들린다는 것이다. 비틀거리다 넘어지고서야 아주 잠깐 인생의 진실을 엿보는 것이다. 그러나 곧 잊고 다시 일어서서 흔들리며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한 발 더, 한 뼘 더, 어제보다 멀리, 오늘보다 높이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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