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던 최고 권력자마저 반했다는 전설의 맛…소고기와 황주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7. 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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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산시 핑야오 편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핑야오(平遙)현을 다스렸던 수령인 지현의 행렬을 재연한 모습


오늘날 중국 북방에서 옛 성곽과 도시계획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곳은 드물다. 시안(西安), 산하이관(山海關) 등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중 산시(山西)성 핑야오(平遙)의 고성은 특별하다. 중국 중세 도시의 활화석으로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또한 안후이(安徽)의 후이저우(徽州), 쓰촨(四川)의 랑중(閬中), 윈난(雲南)의 리장(麗江)과 함께 중국 4대 고성으로 손꼽힌다.

나는 세 고성을 모두 방문했었다. 특히 랑중과 리장은 취재로 셀 수 없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핑야오를 찾았다.

옹성과 해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핑야오고성의 북문


핑야오고성의 성곽은 기원전 주나라 때 지었던 토성이 기원이다. 그 뒤 1000여 년 동안 보수를 해오다가, 1370년 명대에 벽돌로 견고하게 쌓았다.

성곽은 길이가 6,162m, 높이는 10m, 성벽 위 폭은 3~5m에 달한다. 사방에는 크고 작은 6개의 문이 있다. 모든 문은 요새화된 옹성으로 적의 침입을 대비하였다.

문 위 성루는 명대에 지어졌다가 청대 강희제 때 중건하였다. 높이 16.1m, 폭 13.7m로 기세가 웅장하다. 성벽 위에는 72개의 망루도 있다. 성문과 성벽 앞에는 해자를 파서 철저한 방어 기능을 갖추었다.

핑야오고성 성벽 위에는 견고한 망루도 있다.


성 안에는 중세의 도시계획과 수많은 옛 가옥이 있다. 도시는 바둑판처럼 배치하였다. 크고 작은 도로가 잘 닦여졌고 하수도 시설을 갖추었다. 도로 양쪽으로 관청, 식당, 상점, 민가 등을 줄지어 지었다.

건물은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지어져서, 건축 양식이 시대와 용도에 따라 다르다. 실제로 명대 건축물은 지붕이 웅장하지만 청대 것은 아담하다.

현서(縣署), 문묘, 성황묘, 관제묘 등 관청과 유교 건축물은 남쪽에 몰려있다. 하지만 도교사원은 동쪽에, 불교사찰은 북쪽에 있어 여러 종교가 조화롭게 공존한다.

핑야오고성의 중심임을 상징하는 시루(市樓)


가장 핵심적인 건물은 시루(市樓)다. 시루는 고대 도시의 중심을 상징하는 누각으로, 저잣거리를 감독하는 역할을 가졌다.

핑야오 시루는 남대가에 세워진 높이 18.5m의 3층으로, 핑야오에서 가장 높다. 처음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88년에 중축해서 5번을 보수하였다. 랑중고성에도 비슷한 크기와 양식의 시루가 남아있다.

서대가에는 같은 유형의 건물이 여럿 있다. 모두 '표호(票號)'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표호는 중국의 근대식 은행이다. 환어음을 취급하며 예금, 송금, 대출 등 금융 업무 전반을 담당하였다.

진상(晋商)이 활동했던 산시성 도시의 거리를 형상화한 모습


청나라 시기 핑야오에는 표호가 27개가 있었는데, 22개가 서대가에 몰려있었다. 핑야오 표호는 오늘날 주식회사의 형태와 비슷하다. 상인들(股東)이 지분을 나눠가져 설립하였고, 전문경영인(掌櫃)을 선임하여 운영하였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선진적인 경영 방식이었다. 게다가 경영자와 점원에게 능력과 공로에 따라 이윤을 나누었고, 성과와 행실이 나쁘면 퇴출시켰다.

이런 선진적인 경영 시스템 덕분에 핑야오 표호는 청대 금융계를 주름잡았다. 또한 핑야오상방(商幫)을 형성하여 강력한 지역 네트워크를 갖추었다.

중국 최초의 민영 금융기관이었던 일승창(日昇昌)


많은 표호 중 으뜸은 1823년에 이대금(李大金)이 설립한 일승창(日昇昌)이었다. 일승창은 전국 각지에 35개의 분점을 두어 청대 금융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20세기 초까지 명성이 외국까지 알려졌다. 사실상 중국 최초의 민영 금융기관으로서, "일승창의 환어음은 천하에서 통용된다(匯通天下)"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여기에 핑야오 표호의 배후에는 명대 중기부터 활약하였던 산시성 출신의 상인 집단인 진상(晋商)이 있었다. 진상은 대륙 곳곳에 산시회관을 세워서 끈끈한 고향 네트워크를 다지면서 성장하였다.

각지에서 구입한 물자를 수송하는 진상을 묘사한 동상


청대 중기에는 핑야오 표호의 도움을 받아 중국 최대 규모의 상방으로 우뚝 섰다. 소금 집산지였던 장쑤(江蘇)의 양저우(揚州) 상권을 완전히 독점한 덕분이었다.

이 과정에서 핑야오 표호가 진상에게 대규모 자금을 대주었다. 게다가 진상은 각지의 산시회관과 핑야오 표호의 분점을 통해서 각지 시장을 조사하고 수요 상품을 예측하는 기능을 수행토록 하였다.

따라서 진상은 각지 사정에 맞추어 상품을 제때 공급하였고 매점매석도 하였다. 정보를 수집하고 시황을 분석하며 수요에 대처하는 능력은 최고였다.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핑야오표호 중 하나인 회원당(匯源當)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진상은 급속히 몰락하였다. 첫째, 진상은 금융과 유통을 장악하여 이익을 취했을 뿐 제조업 성장을 도외시하였다.

그런데 아편전쟁 이후 서구의 상품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규모와 기술을 못 늘린 중국 수공업은 무너졌다. 진상은 이익 추구에 골몰하여 매점매석과 고리대를 밥 먹듯이 하였다.

이에 수공업자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고 서민은 엄청난 착취에 시달렸다. 2만 2,357개의 전당포 중 4,695개가 진상이 운영하였다. 결국에는 자본과 경영 기법이 앞섰던 서구 은행에게 표호가 무너졌다.

핑야오고성의 한 표호 저택 내부. 과거 누렸던 부귀영화를 엿볼 수 있다.


둘째, 진상은 번 돈을 상공업에 재투자하기보다 땅을 사거나 저택을 짓는 데 몰두하였다. 이는 동아시아인의 전통적인 관념과 맞닿아있다. 하지만 거대한 성처럼 호화롭게 지은 저택에서 사치스럽게 살았던 진상의 사치는 너무 지나쳤다.

셋째, 관료들과 결탁하면서 상인의 도전 정신 및 혁신 의지를 잃었다. 봉건시대에 상인이 권력과 결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문제는 관부의 보호를 받으며 상계를 농단하였고, 다른 상방의 성장을 철저히 억눌렸다. 진상이 성공했던 배경인 뛰어난 창의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청대 식당 풍경을 묘사해서 복원한 모습


오늘날 핑야오고성은 번성하였던 진상과 표호의 영화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핑야오에서 두드러진 가게는 국숫집, 중국식 식초(醋), 소고기, 황주(黃酒) 등이다.

예부터 산시는 "세계의 면은 중국에 있고, 중국의 면은 산시에 있다(世界麵食在中國, 中國麵食在山西)"가 회자될 정도로 국수가 유명하였다. 핑야오는 한술 더 떠서 "산시 제일의 면은 핑야오에 있다"고 자랑한다.

실제로 핑야오에는 듣도 보도 못한 국수가 참 많다. 그 이유는 진상이 전국 곳곳에서 장사하면서 각지의 국수 조리법을 알아왔기 때문이다.

식초(醋)를 직접 제조해서 파는 한 공방


또한 다양한 소스를 핑야오로 가져와서 새로운 면 요리를 끊임없이 창조할 수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1박 2일 내내 면요리를 먹었을 정도로 다채로웠다.

식초 상점의 발달은 지리적인 환경과 관련이 깊다. 산시는 몽골고원의 아래 있어 오래전부터 황사가 심하였다. 그로 인해 기관지에 좋은 식초가 만들어졌다. 현재 핑야오고성에는 식초를 직접 제조해 파는 공방이 여러 성업 중이다.

공방에서는 식초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고 갓 생산된 식초를 맛볼 수 있다. 소고기는 주로 편육으로 파는데 맛이 아주 쫄깃하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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