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배구조, 미개척지 수준···이사의 충실의무 확대가 논란인 것 자체가 어불성설”
정부가 밸류업(기업가치 상승)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는 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재계는 기업의 신속한 경영판단이 어려워지고 경영권 공격 세력에게 악용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대한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은 이에 대해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가 논란이 되는 것 자체가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가 프론티어시장(미개척시장)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반증”이라며 “이사회 중심으로 토론하고 꼼꼼히 따져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의사결정을 한다면 경영에도 도움이 된다”고 단언했다.
이 회장은 삼성증권 초대 리서치센터장, 글로벌 금융투자회사인 메릴린치의 한국 공동대표직 등을 거쳐 올해 초 비영리 사단법인 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을 맡아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가치 제고 운동을 펴고 있다. 지난 4일 이 회장을 경향신문에서 만나 인터뷰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주주가치 제고는 기본이자 경영권 방어 수단”
-정부가 ‘역동경제 로드맵’을 내놓으면서 최대주주 할증평가 폐지 등 최대주주의 부담을 낮추는 방안은 포함하고 일반 주주와 관련된 지배구조 개선책은 내놓지 않았는데.
“대단히 실망스럽다. 관료가 산업화 과정에서 대기업과 같이 컸기 때문에 자본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보인다는 아쉬움이 있다. 최대주주 할증평가가 폐지된다면 상장 대기업에 당근은 주면서 받아야 될 것은 못 받게 될 수 있다. 주주보호에 대한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나마 배당 우수 기업의 주주에게 분리과세로 배당소득세를 낮춰주는 것 정도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배당 증가분에 대해 세제혜택을 주는 것이라, 주주환원을 원래 많이 하는 곳은 추가적인 인센티브가 많지 않다. 눈에 띄는 정책이 없다.”
-재계와 정부는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상속세를 인하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은 지배주주의 잘못된 의사결정에 있다. 따라서 지배주주가 먼저 주주환원 등을 시정하는 솔선수범을 보이고, 그 다음에 정부와 국회가 (움직이는 것이) 순서에 맞다. 지난 3일 발표된 세제 지원책도 잘못됐다. 기업들에게 요구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정부가) 먼저 내놨다. 대기업에 끌려다니는 관료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역동경제 로드맵에서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도록 하는 상법 개정안은 제외됐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나라 기업들은 지배주주의 한 주와 일반주주의 한 주가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경영해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업거버넌스 원칙의 첫 단추는 ‘모든 주주는 평등하다’는 주주평등의 원칙이다. 그 역할을 하는 곳이 이사회다. 그러나 사내이사는 지배주주가 뽑고, 사외이사는 독립성이 결여되다보니 제대로 이사회가 기능을 하기 어렵다. 이사의 역할, 기업가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들이 회사가 시키는대로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해외에선 법으로 명시돼 있거나 대법원 판례로 굳어져 회사경영과 의사결정의 기본으로 돼있다. (이사의 충실의무는) 사람이 숨을 쉬듯 기업의 기본이다.”
-경제단체가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에 반대하는 것은 지배주주의 이익을 회사의 이익으로 치환하기 때문인가
“목적이 달라 보인다. 상장사라면 당연히 기업가치 극대화가 목적이 되고, 주주가치와 기업가치가 많이 괴리되면 괴리를 좁히는게 목적이 돼야 한다. 만약 다른 목적이 있다면 비정상적이다. 그런데 한국은 소유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회사 지분의 20~30%를 소유하면서 마치 100% 자기 회사인 것처럼 행동한다. 현금 흐름의 70~80%는 일반주주의 것인데 마치 내 것인양 배당을 안하는 것은 심각한 도덕적 문제다. 애초 상장하지 말았아야 하는 기업이 많은 것 같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가 경영권 위협에 악용될 수 있다는 반론이 있다.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과거 상법 개정안이 거론될 때에도 외국 자본이 한국 이사회를 점령해 기업 기밀이 유출된다고 주장했지만 한 번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저평가된 주가에 대해 행동주의자가 문제 제기를 할 순 있지만 대부분의 기업에선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 기업이 상장·존재하는 이유는 성장을 통해 주주들에게 과실을 나눠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총주주수익률이 5% 밖에 되지 않는다. 경영권을 보호받고 싶으면 기업가치를 높게 유지하면 된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아무도 경영권을 공격하지 않는다. 주주들이 바라는 것은 성장을 하고 기업 가치를 만들고 주가를 높이는 것이니 그에 맞는 행동을 하면 된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로 배임죄를 비롯한 소송이 빈번해질 것이란 우려는 어떤가.
“이사가 주의의무를 갖고 신의성실로 했을 경우 경영판단의 원칙이 적용돼 소송리스크는 없다. 애플이 자율주행 프로그램을 접지 않았나. 경영진의 실책이기도 하지만, 이사회의 의사결정으로 몇 조를 퍼부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애플 주주가 이에 대해 소송을 걸진 않는다. 합리적 판단으로 꼼꼼히 살펴서 제대로 (결정)했으면 소송 당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동안 이사회를 얼마나 엉터리로 했으면 이런 얘기를 할까 싶을 정도다.”
-재계에선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주가 부양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입장을 내놨다.
“터무니 없다. 기업가치 제고와 주가는 직접적 상관관계가 있다. 진정성을 갖고 밸류업을 하고 있는 금융지주가 대표적이다. 모든 금융사가 하반기 제대로 된 밸류업 계획을 발표할 것이란 기대감에 주가가 오르고 있다. 밸류업을 그동안 가장 잘해온 메리츠금융의 경우 주가순자산비율(PBR)이 약 1.7배다. 은행이 없는데도 시가총액이 하나금융과 비슷하다. 이런 명확한 사례가 있는데 그런 주장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재계는 지배주주에게도 기업가치 제고에 대한 동기 부여가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왜 지배주주 입장에서도 기업가치를 높이는게 중요한가.
“그 질문은 대한민국에서만 나온다. 나의 경제적 가치가 늘어나는데 그것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싫어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주가를 낮춰 상속세를 낮추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을 해볼 수도 있다. 회사의 많은 지분을 제3자에게 팔았는데 주가를 낮게 유지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배임이다. 한국은 선진국인데 그런 질문이 경제단체에서 나온다는 게 놀랍다.”
-기업가치 제고 계획 자율공시가 효과를 보기 위해선 어떤 개선이 필요한가.
“시장은 자율성이 중요하다. 법·제도를 잘 갖춰 평평한 운동장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상장사 간 선의의 경쟁이다. 그것이 좋은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곳이 금융업종인데, 모두 지배주주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배주주 없는 곳은 잘하고 있으니 지배주주가 있는 것이 문제라는 정답이 나온다. 그렇지만 주주평등 원칙을 강조하는 메리츠금융처럼 지배주주가 있어도 기업가치를 제고할 수 있다. 진정성을 가질 수도, 형식적으로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기업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재계)패밀리들의 의지와 진정성이 제일 중요하다.”
-공매도 금지 조치가 내년 3월까지 연장됐는데, 이에 대한 평가는
“감독 당국이 큰 실수를 했다. 공매도로 개별 종목의 주가가 일시적으로 하락할 순 있지만 중장기적으론 시장 가격을 끌어내린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한국처럼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는 것은 시장을 왜곡하는 것이다. 국제 자본시장이란 물이 흐르듯 흐름이 있는 것인데 한국에서 그 흐름이 끊기게 된다. 개인투자자를 만족시켰을진 모르지만, 한국은 증시에선 신흥시장도 아니고 프론티어마켓이라는 인식을 더 각인시켰다. 내년 초라도 빨리 재개하는 게 중요하다.”
https://www.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2407042116005
https://www.khan.co.kr/economy/finance/article/202406130600075
김경민 기자 kim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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