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삼신기 주역·메달 수집가’ 박찬희 “치열했던 농구 인생, 아쉬움 없이 물러납니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7월호에 게재됐음을 알립니다.
공식적으로 은퇴가 발표된 후 한 달 정도 지났다. 실감나는가?
일단 훈련에 대한 강박이 없으니까 마음이 편하다. 은퇴 발표 후 여행도 다녀오는 등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며 푹 쉬고 있다. 운동도 틈틈이 했다. 은퇴 후 근육이 빠지거나 살이 급격히 찌는 등 몸이 망가지는 선배들을 많이 봤다. 그래서 운동은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다. 물론 선수 시절과는 다르다. 예전에는 내 직업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참고 했지만, 지금은 숨이 찰 거 같으면 그만한다(웃음).
은퇴는 언제부터 생각하고 있었나?
DB와 2년 계약을 한 2022년에도 어느 정도 생각했지만, 그때는 막연했다. 진지하게 고려한 건 지난해부터였다. 출전시간이나 역할이 줄어들어서 은퇴하는 건 아니다. 농구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농구가 지겹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살 때 부모님 반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몰래 농구를 시작했는데 지루한 적은 있었다. 그래도 그땐 농구가 삶의 전부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 또 열심히 했지만, 이번에는 하기 싫은 걸 계속 참아가며 해야 하는 상황에 지쳤던 것 같다. 지겹다는 감정이 극에 달했다.
1월 21일 창원 LG와의 홈경기가 선수로 치른 마지막 경기로 남았다. 마지막 경기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뛴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그런 부분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없다. 농구와 관련된 아쉬움이 남았다면 어떻게 해서든 한 시즌 더 뛰었을 텐데 일말의 아쉬움도 없다. 원래 아쉬움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성격이기도 하다. 그만큼 열심히, 치열하게 농구를 했다. 정규리그 막판에 김주성 감독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뛸래?”라고 하셨지만, 그렇게 뛰는 게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아서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나보단 신인들이 조금이라도 더 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지막 시즌에 우승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는데 챔피언결정전에 못 오른 부분은 아쉬울 것 같다.
정규리그에서는 선수단이 잘 뭉쳤지만, 시즌을 치르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생긴다. 4강 플레이오프에서 판정과 관련된 이슈가 있었지만, KCC라는 팀 자체가 경기를 잘했다. 경기력 외적인 부분을 탓하기 전에 이 부분부터 차이가 컸다. 아쉽긴 하지만, 1차전을 보고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선수들이 동요가 될까봐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안양 KGC(현 정관장)의 첫 우승 멤버다. 특히 우승을 확정지은 6차전은 17점 차를 뒤집은 역전승이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시리즈 흐름 상 6차전에서 졌다면 7차전도 졌을 것이다. 동부 가드들이 갑자기 당황하는 모습이었고, 그 틈에 전세를 뒤집었다. (양)희종이 형의 위닝샷을 벤치에서 보는데 슬로우 모션이 걸린 것처럼 날아가더라. 포물선을 보는데 딱 들어갈 것 같았다. 여론이 100명이라면 101명이 동부가 이길 거라 예상한 시리즈였다. 워낙 기세가 좋은 팀이었고, 정규리그 맞대결도 1승 5패 열세였다. 이를 뒤집고 우승해서 마냥 신났다. 골밑에 대자로 누워있는 (오)세근이를 일으켜주려고 했는데 너무 무겁더라. 포기하고 다른 선수들한테 갔다(웃음). 그 다음은 기억이 없다.
장난 아니었다. 월드컵에서 너무 처참하게 져서 한국 돌아온 후 다들 의욕이 떨어졌다. 한 번은 유재학 감독님이 훈련 도중 갑자기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아무런 말씀도 안 하고 나가셨다. 화가 많이 나셨던 것 같다. 그때 선수들끼리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인데 이렇게 준비하면 망신 당한다”라며 분위기를 다잡았다.
우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던 순간은?
자신감을 갖고 맞이한 대회는 아니었다. 몽골과의 조별리그 맞대결을 이상하게 시작하기도 했다. 시원시원하게 이긴 건 아니었지만, 토너먼트에서 일본과 필리핀을 꺾으면서 자신감이 살아났다. 우승 순간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문)태종이 형을 비롯해 (양)동근이 형, (조)성민이 형, (김)태술이 형 그리고 막내까지 다 잘해줬다. 은퇴 발표 직후 전자랜드 시절 위닝샷 넣은 경기를 기억에 남는 경기로 꼽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인천 아시안게임 결승이다.
전역한 지 얼마 안 돼 억울하진 않았나?
그렇진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낀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거고 우승 반지 따내는 거보다 힘든 일이지 않나. 하다 보니 금은동 메달을 다 따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대표팀에서 뛰었다. 대표팀이 주는 사명감도 컸을 것 같은데?
영광스럽기도, 애증의 감정이 들기도 했다. 종목을 막론하고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국가대표를 꿈꾸지만 힘들 때도 있었다. 그래도 대표팀 경력이 점점 쌓이다 보니 책임감, 자부심도 생겼다. 내가 막내였던 시절과 지금 대표팀 막내들은 다르긴 하다. 물론 시대와 흐름에 따라 바뀌는 부분도 있지만, 대표팀은 기본적인 규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무너지면 아무리 날고 기는 선수가 선발돼도 성적을 낼 수 없다.
점점 일본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다. 오랜 기간 대표팀에서 뛰었던 만큼 일본과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을 것 같다.
2018년의 일이다. 당시 일본은 코칭스태프가 외국인일 뿐만 아니라 통역, 트레이너 등 지원스태프가 10여명이었다. 지원스태프가 많으니 웜업할 때도 포지션별로 나눠 체계적으로 몸을 풀었다. 각 포지션마다 필요한 움직임이 다르지 않나. 반면, 우리는 웜업을 도와주는 트레이너가 1명이었다. 나머지 1명은 아이스박스로 얼음 관리를 해야 했다. 지원의 차이가 느껴졌을 때 기분이 너무 별로였다. 그때부터 (일본의 추월이)시작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협회도 고충이 있겠지만, 선수 입장에서 봤을 때 지원이 너무 비교됐다. 일본처럼 선수들이 뽑히고 싶은 팀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든 빠지려고 하는 팀이 되어버렸다. 한국은 농구 시장 자체가 작아서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한국을 응원하겠지만 일본은 앞으로 시장, 인프라, 선수들의 레벨 모두 더 올라갈 것 같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결승이다. 중국에 키 큰 슈터(왕스펑)가 있었는데 3쿼터에 나를 상대로 포스트업하며 연달아 득점을 올렸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경기 종료 1분 30초 전까지 앞서고 있었던 경기여서 더 아쉬움이 남는다. 광저우 아시안게임도 우승했다면 농구 인생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도 아쉽다. 군 면제까지 1분 30초 남았었는데…(웃음).
농구를 시작한 후 많은 지도자와 함께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지도자를 꼽는다면?
모든 분들이 의미가 있고 나에게 영감을 주셨다. 그래도 꼽는다면 황선남 선생님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초등학생 시절 농구를 시작할 때 농구부장님이었다. 뜬금없이 농구부에 찾아가 “농구하고 싶어요”라고 하니 “너 뭐야?”라며 혼내셨다. 그리고 달리기를 시키셨는데 그러면서 농구를 시작하게 됐다. 황선남 선생님께 유독 감사한 일도 있다. 어릴 때 공부를 잘한 편이어서 5학년 때 농구를 그만두려고 했다. 그때 선생님이 학원비를 대신 내주면서 계속해서 농구를 할 수 있게 해주셨다. 경희대 최부영 감독님께도 감사드린다. 대학 때 양쪽 새끼발가락을 각각 두 번씩 다쳤다. 대학 시절을 돌아보면 목발 짚고 다닌 기억밖에 없을 정도다. 몸이 근질근질해서 운동하겠다고 하면 최부영 감독님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완벽하게 회복부터 하라고 하셨다. 최부영 감독님이 무리해서 투입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프로에서 큰 부상 없이 14년 동안 뛸 수 있었다. 혹사를 당했다면 프로에서 어디가 고장 났을 것이다.
은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를 지도해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덕분에 프로에서 오랜 기간 응원받으며 선수로 많은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유도훈 감독님께도 드릴 말씀이 있다. 내가 힘들던 시기에 트레이드로 데려온 후 재밌게 농구하며 전성기를 보낼 수 있게 해준 분이다. 많은 분들이 사이가 안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미웠을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다. 2019-2020시즌 경기 도중 유도훈 감독과 언성을 높였는데?
얘기하자면 길다. 전자랜드가 2018-2019시즌에 그렇게 염원했던 챔피언결정전에 올랐다. 나는 베스트5와 수비5걸, 우수수비상까지 받았다. 당연히 연봉이 인상될 줄 알았는데 삭감 대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연봉 조정 신청을 했고, 20년 만에 선수가 이긴 사례가 됐다. 그런데 이후 팀에서 나를 누르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위기가 그러다 보니 유도훈 감독님께 쌓인 것도 있었다. 그 경기는 내가 허리 부상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1분 정도 남았을 때 점수 차가 10점 정도까지 벌어졌다. 누가 봐도 우리가 승기를 잡았는데 유도훈 감독님이 소리 지르며 욕을 하셨다. 물론 내 행동도 잘못됐지만, 몇 개월 동안 쌓였던 게 터진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의 골이 생겼고, DB로 이적하기 전까지 두 시즌을 허무하게 보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때 나를 영입하려고 했던 팀이 있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전자랜드에서의 마지막 두 시즌이 더 아쉽게 느껴졌다.
너무 많은데…. 꼭 한 명씩 꼽아야 한다면, 음…. 일단 1번은 동근이 형이다. 동근이 형의 가장 무서운 점은 꾸준함이다. 그리고 수비를 진짜 잘한다. 신인 때는 힘도 없을 때라 ‘못 뚫겠는데’ 싶었다. 타고난 몸이다. 본인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만든 몸이라고 하는데 옆에서 보면 그렇게 많이 하시진 않는 것 같았다(웃음). 2번은 성민이 형이랑 (이)정현이(삼성)가 떠오르는데 그래도 프로에서 같이 뛴 정현이를 꼽겠다. 정현이는 득점뿐만 아니라 보조 운영까지 해준다. 그게 1번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된다. 3번은 두말할 나위 없이 태종이 형이다. 전성기가 한참 지난 후 한국에 왔는데도 클래스가 달랐다. 인천 아시안게임 우승 후 진짜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한국에 진심이구나’라는 게 느껴졌다. 인성도 굉장히 좋은 형이다. 4번은 세근이다. 센스티브한 선수다. 농구 자체를 워낙 잘 알고 하는 선수여서 함께 뛰면 편하다. 세근이야말로 노력해서 만든 몸이다. 5번은 (김)종규를 꼽겠다. 종규가 20살일 때부터 함께 대표팀에서 생활했는데 운동능력과 높이가 압도적이었다.
젊은 선수 중 주목하는 선수는?
작은 정현이(소노)다. 2019년에 함께 대표팀에 선발됐을 때 처음 봤는데 그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얘기했다. “곧 작정현의 시대가 올거야”라고. 프로 데뷔한 후 직접 “나도 네 팬이야. 꼭 잘 성장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허)훈이, (변)준형이도 잘하고 있지만 향후 KBL은 작정현이 지배할 것이다.
얼마 전 셋이 밥을 먹었다. 은퇴했으니까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자기들 힘든 얘기만 하더라. 나 은퇴하는데 해줄 말 없냐고 하니 마지못해 고생했다고 했다. ‘이게 우리지. 동기들끼리 무슨 위로냐’ 싶었다(웃음).
돌아보면 인삼신기 1기는 다시 나올 수 없는 조합이다.
뭉쳐있을 때는 몰랐다. 물론 선수 구성이 좋다는 건 알았지만,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던 건 아니었다. 다들 나이가 어릴 때였기 때문에 으스대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그러다 보니 결과도 냈는데 세월이 지난 후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조합’이라고 말씀해주신다. 그 얘기를 많이 듣다 보니 ‘진짜 말이 안 되는 조합이었구나’ 싶기도 하다.
지도자 목표도 있다고 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계획이 있는 건 아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봐야 향후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아들이 농구를 한다면?
(1초도 고민 없이) 말린다. 너무 힘들다. 물론 어떤 일을 해도 힘든 부분이 있겠지만, 내가 운동을 했으니 아들은 다른 걸 했으면 한다. 꼭 운동을 해야겠다면 다른 종목을 하길 바란다. 활동적이어서 뛰어노는 걸 좋아하긴 한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인사를 남긴다면?
프로에 데뷔할 때부터 팬이었던 분이 있는데 지금은 지인이다. 그 분을 비롯해 팬들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며 경기장에 와서 선수들을 응원하신다. 덕분에 힘들 때 기운을 받을 수 있었다. 박찬희라는 선수를 오랜 기간이든 짧은 기간이든 응원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이제 농구를 그만뒀으니 응원을 받던 순간들이 많이 그리울 것 같다.
#사진_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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