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석] 청년 죽음 외면하면서 '인구 국가비상사태'라니
저출생 위기 극복 위해선 '국가 불신' 해소해야
[더팩트ㅣ박숙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초저출생 위기 극복을 국가 최우선 과제로 공표한 것은 늦었지만 바람직한 일이다. 이날 회의에서 대통령과 정부는 예비 부모가 솔깃할 만한 정책들도 내놨다. 육아휴직 급여 상한을 최대 250만 원으로 올리고, 육아·출산 휴직 기간과 횟수도 늘려준다. 맞벌이 부모를 위해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통합해 최대 12시간까지 교육·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외에 신생아 특례대출 소득기준 완화 혜택으로 보금자리 마련도 우회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회의 내용 중 '앗'하는 대목이 있었다. 윤 대통령은 "일부에서는 자녀가 부채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며 "삶의 가치관, 인식의 전환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과도한 경쟁 문화 등 근본적인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문화적 요인도 신경써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자 회의에 참석한 박민 KBS 사장은 "드라마·예능을 통해 '출산이 축복이 되고 육아가 행복이 되는 사회'라는 인식을 확산되도록 전사적 역량을 기울이겠다"고 답했다. 이철우 경상북도지사는 "기업에서 고졸 출신 채용을 대폭 확대해 초혼 시기를 앞당기자"고 했고, 교육부는 저출생 대책 일환으로 학·석·박사 통합과정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청년들의 늦은 사회 진출과 만혼이 저출생의 원인 중 하나로 봤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인구 비상사태'를 선언하기 나흘 전, 하나의 젊은 '인구'가 스러졌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전주페이퍼 공장에서 일해온 19살 A 씨가 홀로 배관 점검 업무를 하다 숨을 거뒀다. '남에 대한 이야기 함부로 하지 않기', '하기 전에 겁먹지 말기', '구체적인 미래 목표 세우기', '운동하기', '미술·사진 등 예체능 계열 손대보기'. A 씨가 메모장에 남긴 2024년 목표였다. '일본어, 영어 등 다른 언어 공부하기', '경제에 대해 공부하기' 등 펼치지 못한 장래 인생 계획도 넘쳤다. 유족은 장시간 근로에 따른 과로사, 가스누출 가능성을 제기했고, 사측은 모두 반박했다. A 씨의 모친이 사측의 공식 사과와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무제한 단식투쟁에 돌입하자, 전주페이퍼는 7일 사고현장 재조사를 하기로 했다. 현재까지 이와 관련한 대통령의 별도 메시지는 없다.
청년 노동자 사망사고는 역대 정부에서도 되풀이됐다. 2016년 박근혜 정부에선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하청업체 노동자 김모 군이 열차에 치여 숨졌다. 문재인 정부에선 2018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하청업체 노동자 김용균 씨가 석탄 운송용 설비를 점검하다 컨베이어에 끼여서, 2021년 스물셋 대학생이 경기도 평택항 부두에서 일하다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목숨을 잃는 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 대학생의 빈소를 직접 조문해 유가족을 만나 사과하고 산재사고 예방 조치를 주문했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10월에는 SPC 계열 제빵 공장에서 20대 노동자가 기계 끼임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출근길 약식 질의응답에서 "최소한의 배려는 하면서 사회가 굴러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안타까워하며 경위 파악을 지시했다.
청년의 죽음은 노동현장뿐만이 아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해 산부인과를 왕복 8시간 다니며 어렵게 가진 아이가 군대에 들어가더니 지난해 7월 수해 실종자 수색작업 중 숨졌다. 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즉 '채 상병 사건'의 진상규명은 1주기가 다 되도록 밝혀지지 않았다. 사망사건을 수사한 결과를 경찰에 이첩했다가 국방부 장관이 보류 및 회수 지시를 내렸지만 수사단장이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을 두고 대통령실은 "국방장관의 정당한 이첩 보류 지시 명령을 수사단장이 어긴 항명 사건이 그 실체이고 본질"이라고 했다. 사건 당시 사단장이었던 임성근 해병 소장은 지난달 경찰청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라고 했다. 군대에서 윗사람의 명령에 군말 없이 따라야 한다면 전장의 환경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유지해 적에 대한 대비태세를 갖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위법한 명령에 따를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대민 지원을 하라며 급류에 내모는 명령을 군말없이 따라야 하는 국가라면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산재 사고, 군대 사고에 대한 대통령실과 정치권의 안일한 태도는 '국가 불신'으로 이어진다. 윤 대통령이 언급한 "자녀가 부채라는 부정적인 인식"은 사교육 부담을 비롯해 자녀를 키우는 데 소요되는 금전적 비용, 출산·육아로 인한 커리어 불이익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출발점부터 불평등한 부조리한 사회에 아이를 내보내 본인과 똑같은 인생을 살게 할지도 모른다는 미안함, 직장 내에서, 군대에서, 시내 한복판에서 한순간에 생명을 잃더라도 책임지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불안감이 오랜 기간 쌓인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예능으로 인식을 바꾸거나, 청년들의 사회 진출을 앞당기는 식의 정책으론 '출산이 축복이 되고 육아가 행복이 되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적어도 근로 안전 매뉴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부당한 지시를 무리하게 따르다 목숨을 잃었을 때에 대통령이 '격노'의 메시지를 꾸준히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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