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분노는 언제 국민을 이롭게 하는가 [조선칼럼 장대익]
지도자 분노는 그와 달라서 사회적 불의 바로잡을 때 써야
국민이 겪는 불행한 사건 사고… 깊은 슬픔으로 公的 분노할 때 사회는 한 발자국 앞으로 간다
영화 ‘인사이드아웃2′에는 사춘기로 막 진입한 소녀가 느끼는 감정들이 총출동한다. 초등학교 절친들과 헤어져 다른 중학교로 진학해야 하는 주인공 라일리에게 불안, 당황, 시기, 따분함의 감정들이 들이닥친다. 이들은 기존의 기쁨, 슬픔, 공포, 역겨움, 분노의 감정들과 뒤범벅이 되어 마침내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킨다.
이 시리즈가 흥미로운 것은 이런 다양한 감정들이 각각 캐릭터가 되어 그에 걸맞은 감초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2편의 주인공 ‘불안’이는 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려다가 매번 다른 감정들과 갈등을 빚는다. 새로운 환경에서 소속감과 자존감을 얻으려고 발버둥치는 사춘기의 뇌를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이 감정 스토리는 재미 말고 의미도 준다. 기쁨과 같은 긍정적 감정뿐만 아니라 슬픔, 공포, 역겨움, 분노, 불안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도 인생사에서 꽤 쓸모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실연 때문에 슬픔에 빠지는 게 대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있다. 슬픔이라는 고통은 ‘이제 다시는 이런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게 만든다. 이렇게 부정적 감정은 그 감정의 원인으로부터 회피하게 만드는 동기를 준다. 그런데 고통을 당하는 것은 나인데, 그 고통 때문에 이득을 보는 것은 정작 내가 아니라 내 유전자라는 게 함정이다. 그러니 감히 당신은 슬픔을 즐길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진화 정신의학의 창시자인 네스는 “나쁜 감정은 생존을 위한 유전자의 합리적 선택”이라고 말한다.
불안. 이것은 위험이나 불쾌한 일이 현존하거나 예상되는 상태에서 느끼는 부정적 감정인데, 영화에서 라일리처럼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상황에서는 마냥 기쁘고 느긋한 감정보다 더 큰 이득이 된다. 불확실한 환경에서는 예기치 못한 위험이나 손해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늘 해맑거나 까칠한 것은 문제다. 물론 늘 불안에 ‘휩싸이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하지만 제일 심각한 문제는 감정과 상황이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경우다. 가령, 긍정적 감정이 켜져야 할 ‘기회’ 상황인데도 부정적 감정이 켜지거나, 부정적 감정의 스위치를 켜서 최악을 대비해야 할 ‘위기’ 상황에서 되레 긍정적 감정으로 앞서 나가는 경우이다. 사자가 주위를 어슬렁거리는데도 즐겁게 춤을 추고 놀던 사람들은 우리 조상이 될 수 없었다.
우리 지도자들이 매일 경험하는 부정적 감정의 세계는 훨씬 더 복잡하다. 정치 지도자들의 뇌는 가히 감정의 폭풍 전야이다. 지역구의 존경받는 국회의원들은 감정의 그릇이 크다. 주민들을 만나다 보면 울고 분노하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지도층이 자신들과 감정의 동조를 이루지 못했을 때(국민은 슬픈데 지도자는 분노만 표출하는 상황) 가차없이 비난한다. 미래를 걱정하는 국민들은 지도층의 근거 없는 낙관이 훨씬 더 불안하다.
요즘, 대통령의 ‘격노’에 대한 진실공방이 뜨겁다.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에 관한 청문회에서 한 관계자는 “한 사람의 격노로 이 모든 것이 꼬였다”고 증언했지만, 대통령실의 관계자는 “격노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에 관한 여권 유력 정치인의 언행들에 대해 대통령의 격노가 아직 누그러지지 않았다는 루머도 여전하다. 이런 일련의 대통령의 격노는 어떤 의미를 지닌 부정적 감정일까?
영화에서처럼 분노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해결책이다. 감정 연구의 대가인 에크먼에 따르면 분노는 어떤 위협이나 위험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힘을 제공하거나 불의를 바로잡게끔 동기를 부여하는 힘을 지닌다. 그렇다면 지도자의 분노는 무엇이 달라야 할까? 지도자는 일반인처럼 자신을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용도로 자신의 분노를 승화시킬 수 있는 자이다. 일종의 공적 분노다. 우리는 이런 지도자들의 언행을 보고 함께 분노한다. 국민이 겪는 불행한 사건·사고에 대한 깊은 슬픔.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없었는가를 되묻는 공적 분노. 지도자들이 이런 성숙한 부정적 감정들을 작동시켜야 사회는 개선될 수 있다.
게다가 우리 지도자들의 분노는 대개 특정 사람(집단)을 향해 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것은 특정 행위요 시스템인데 말이다. 에크먼은 제안한다. 사적인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을 돕고 싶다면 타임아웃을 외치라고. 잠시라도 심호흡을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사적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대통령실에서 타임아웃을 외칠 수 있는 참모는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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