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중동천일야화] 서구 민주주의는 붕괴 중인데… 이란 대선 결과는 ‘희망의 끈’인가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정치 2024. 7. 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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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美대선·유럽 극우파 약진 중에 이란 민주주의의 反轉
그동안 권위주의·민주주의 퇴행 비판받았던 국가라 더 놀라와
경제난 민심이반이 결정적… 최고지도자·보수파와의 협력이 관건
그래픽=김성규

이란 대통령 선거가 화제다. 결선투표에서 개혁파 마수드 페제시키안 후보가 보수파의 사이드 잘릴리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지난달 말 1차 투표에서 세 강경 보수 후보와 맞붙어 의외의 1위를 차지한 승기를 끝까지 지켜낸 것이다. 결선투표의 관건은 보수 유권자들의 표 결집 여부와 모처럼 승리 가능성을 보게 된 진보 진영의 투표 참여였다. 1차 투표율은 39.9%로 역대 최저였다. 결선투표율은 49.8%였다. 한 주 만에 10%p 올랐다. 1차 투표를 포기했던 유권자 600여 만 명이 마음을 바꾸어 결선투표에 참여한 것이다.

그래픽=김성규

결과적으로 잘릴리 후보는 1차 투표 때 보수 후보들이 나누어 가진 표만큼을 얻었다. 반면 승리한 페제시키안 후보는 결선투표장에 새로 등장한 표를 더 얻었다. 물론 교차 투표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략 투표율 10%p 상승이 페제시키안의 승리를 이끈 것은 확실하다. 이는 그동안 정치적 의사 표시를 포기했던 유권자들이 움직인 결과다. 낮은 투표율은 체제의 정통성 위기와 직결된다. 2017년 대선 투표율 73.3%에서 2021년 48.78%로 급전직하했을 때 최고 지도자는 무척 놀랐다고 전해진다. 체제 입장에서 침묵하는 다수는 공포스러운 존재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 최고 지도자는 라이시와 유사한 보수 후보를 당선시키되 진보 성향의 약한 후보 출마를 허용해 투표율을 끌어올리려 했다. 그 후보가 페제시키안이었다.

페제시키안은 어떻게 예상을 깨고 승리할 수 있었을까? TV 토론 등 선거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페제시키안의 뛰어난 역량이 한몫했다. 보수파 후보들을 압도했다. 무엇보다 하타미, 로하니 전 대통령과 자리프 외교장관 등 개혁 진영의 상징적 인물들이 총력 지원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경제난과 사회 갈등에 따른 민심 이반이었다. 2018년 트럼프의 제재 복원 이후 이란 경제는 어려워졌다. 중도파 로하니 정부가 물러나고 강경 보수파 라이시 정부가 들어선 후 경제는 더 추락했다. 여기에 히잡 사태가 터졌다. 젊은이들은 동요했다. 쿠르드와 발로치 등 소수민족들도 술렁거렸다. 정부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지금까지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 다수 국민은 두려워하며 침묵했다. 그러던 차에 이번 대선 결선투표가 이 침묵을 깨는 묘한 계기였다.

그래픽=김성규

개혁파 대통령을 맞는 이란은 이제 극적으로 변화할까? 쉽지 않아 보인다. 대통령의 권력은 최고 지도자에 비해 현저히 약하다. 국회도 보수 진영이 압도하고 있다. 판도를 뒤집을 동력을 만들어내기란 녹록지 않다. 이를 잘 아는 페제시키안은 최고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여러 차례 천명했다. 강경 보수의 본진인 혁명수비대에 대한 상찬도 마다하지 않는다. 예상외 결과를 받아 들었다지만 최고 지도자와 보수 진영의 관록은 만만치 않다. 차제에 신임 대통령을 내세워 사회에 퍼진 불만을 완화하고 제재 해제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 할 것이다. 노회한 이들이다. 최고 지도자가 졌던 국정 실패 책임을 대통령과 내각으로 돌릴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 결과가 별 의미는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그라들었던 개혁파가 다시 도약할 입지를 마련했다는 의미가 있다. 체제 내에서 개혁파의 권력 기반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민심의 방향과 위력을 확인했다. 민심은 현 강경 보수 집권층의 무능을 질타하고 정책 변화를 주문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사실 이란 국민 다수는 자국의 체제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서구 민주주의나 아랍의 권위주의보다 자기들의 혁명 이슬람 공화국 제도가 우월하다고 자부한다. 다만 현 최고 지도자와 집권층에 대한 불만이 크다. 핵 협상을 파기한 미국이 밉지만, 어쨌든 도탄에 빠진 국민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집권 세력 아닌가. 그러나 경제는 추락하고 사회 갈등은 걷잡을 수 없는데 중동 각처의 친이란 정파와 무장 집단을 지원하고 있다. 헤즈볼라에 돈과 무기를 대고, 하마스를 도와 전쟁할 때인가 하는 불만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래픽=김성규

특히 이번 선거의 계기가 된 라이시 대통령 탑승 헬기 추락 사건의 심리적 충격이 크다. 제재 때문에 부품 조달과 정비 지원이 막혀 낡은 기체는 고립된 이란을 상징한다. 대통령이 탄 헬기가 추락할 정도면 민간 항공기는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어떻게든 제재 국면을 벗어나지 않으면 이란의 하늘길은 하루하루 더 닫히게 된다.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란 국민 눈에 하늘을 외국 항공기들에 내주어야 하는 현실은 부조리 상황이다. 혁명 이란의 자부심은 많이 희석되어 버렸다.

페제시키안은 당선의 기쁨과 함께 무척 어려운 과제를 받아 들었다. 자신을 지지한 개혁 세력의 요구를 반영하며 개혁과 개방을 통해 경제난을 해결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질적 권력을 가진 최고 지도자와 척지지 않고 공존해야 하는 위치에 섰다. 시간이 없다. 경제난과 사회 갈등을 빨리 해소하지 못하면 큰일이다. 최고 지도자는 대통령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다. 모처럼 기대하며 표를 모아 준 유권자들의 실망과 불만은 폭증할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란 정국을 좌우할 다른 변수인 미국 대통령 선거 분위기도 좋지 않다. 만일 트럼프가 승리할 경우 핵 협상 재개 및 제재 완화 등 페제시키안의 대외 정책 공간은 현저히 좁아진다. 여러모로 낙관보다는 비관적 요소가 많다.

다만 국제 정치 차원에서 눈길을 끄는 긍정적 징후가 하나 있다. 그동안 권위주의가 심화하며 민주주의의 퇴행을 보여 비판받아 온 주요 국가에서 선거를 통한 반전이 나타난 것이다. 이번 이란 대선을 포함해 튀르키예 지방선거, 인도 총선 등이다. 이 나라들의 유권자는 표를 통해 집권 세력의 독주에 제동을 걸었다. 변화를 요구한 셈이다. 어수선한 미국 대선과 유럽의 극우파 약진 등 소위 민주주의의 본진을 자임하는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우려스러운 상황에 대비된다. 질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붕괴하는 종말론적 세태 속에서 나타난 희망의 끈이랄까? 기이하면서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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