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본다는 것은]추상화에 뭘 그렸는지 묻지 말라… 무엇이 비워지는지 체험하라
엘즈워스 켈리의 추상화… ‘무엇이 아닌지’를 물어야
정서도 운동도 서사도 없어… 비움을 체험하는 명상처럼
모든 것의 부재를 체험하게 돼
너무 단순한 나머지 뭔지 모를 현대 추상화. 그게 뭔지 꼭 알아야 하나. 뭔가 압도적이고 강렬한 체험을 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그러나 그러한 시각 체험에 그치지 않고 그게 뭔지 기어이 알고 싶을 때, 즉 어떤 지적인 이해에 도달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는 그게 뭔지 물어봐야 대답을 얻을 수 없다. 그럴 때는 그게 무엇인지 묻는 대신, 무엇이 아닌지 물어야 한다.
켈리의 (주요) 작품들은 무엇이 아닌가. 켈리의 작품은 우리가 익숙한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특정한 자연환경이나 사물이나 사건을 묘사하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은 채로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한다. 마치 내가 누구냐고? 나는 그냥 나라니까, 라고 말하는 것처럼.
켈리의 작품은 흐리멍덩하고 복잡한 작품이 아니다. 예술가 상당수가 어지러운 붓 터치로 복잡한 선과 면을 그려 넣어서 작품에 깊은 공간감과 복합성을 부여하려 든다. 그러나 켈리의 작품에서는 어떤 깊이나 복합성도 발견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색, 단 하나의 면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게다가 그 색도 선명하기 이를 데 없고, 그 면도 잘린 듯이 분명하여,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순함이 엄정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켈리의 작품에는 귀족 거실에 일렁이는 샹들리에에서 볼 수 있는 호들갑 같은 것이 전혀 없다. 그것은 맑은 칼날처럼 엄정하다.
켈리의 작품은 시간을 표현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 화폭에서는 운동하는 존재는 묘사되지 않고, 붓이 지나간 동세조차 소거되어 있다. 따라서 그 앞에서는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없이 정지된 그 작품을 보는 순간, 보는 이의 시간도 정지한다. 시시각각으로 몰려드는 온갖 자극으로부터 벗어난 명상의 방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분주한 것은 인간의 삶이지, 켈리의 작품이 아니다.
켈리의 작품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인지하게끔 하려는 작품이 아니다. 중세 종교화처럼 성서의 내용을 제시하지도 않고, 특정 사건을 기록하려 들지도 않는다. 켈리의 작품에는 레퍼런스와 서사가 없거나 희박하다. 그의 작품을 볼 때 경험하는 것은 인지 작용이라기보다는 인지 작용 이전의 시각 체험이다. 그 시각 체험은 정서적 설렘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크 로스코의 그림과도 다르다.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흐느낄 수는 있어도 켈리의 그림을 보고 울기는 어렵다. 로스코의 뭉클한 색깔은 당신을 적시지만, 켈리의 냉정한 색깔은 당신을 튕겨낸다. 켈리의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아도 그 작품을 만든 창작자의 정서에 다가가기 어렵다. 켈리의 작품은 관람객을 창작자의 마음으로 안내하는 통로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미술관을 배회하던 당신이 마주치게 되는 이 거대한 판자때기는? 선명하며, 단순하며, 엄정하며, 확실하며, 흔들리지 않는 이 거대한 색채화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만드는 것이 현대 추상 예술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 채, 켈리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어떤 시각적 체험을 한다. 많은 것들이 혼란스럽고 명멸하는 세상에서, 다들 자기 좀 봐 달라고 고함치는 세상에서, 다들 시간의 흐름 속에 휩쓸려가는 삶 속에서, 다들 무엇인가 해내느라 분주한 삶 속에서, 간신히 발길을 옮겨 켈리 작품 앞에 선 사람은 그 모든 것이 부재한 체험, 세상과 삶이 온통 비워진 체험을 하게 된다. 당신이 매일 아침 명상하면서 애타게 바라던 그 체험, 그 체험이 거기에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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