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안전’을 선택할 수 있는 나라
‘자본주의’ 사회라는 용어가 뒤트는 진실은 그것이 ‘사회’인 한 여전히 사람이 가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소비자로서만이 아니라 생산자로서의 존엄함도 원한다는 사실이다. 최근 화성시 리튬전지 생산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를 돌아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고도화라는 시스템 중심적 사고에 묻힌 생산자로서의 시민을 위한 자리는 어디 있는지 묻게 된다.
이 화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첫째, 화재방지와 대피시스템이 고도화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단일 화재로 23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스템은 고도화될수록 설계자도, 그 안의 사람들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취약지점들을 만들어낸다. 누구도 이 지점에서 시스템의 안정성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23명의 사망자 가운데 18명이 이주노동자, 그리고 20명이 하청노동자였다. 위험한 작업 현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이주·하청노동자들로 채워지고, 노동유연성을 명목으로 필요 이상의 하청 구조가 자리를 잡아버린 한국의 노동시장이 이렇게 얼굴을 드러낸다. 2017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에서 비정규직의 삶과 노동조건보다 정규직이 될 자격이 사회적 논란의 중심이 되어버렸을 때, 어렵사리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이 유예되고, 유예기간이 끝날 때쯤 다시 유예가 논의되었을 때, 이미 보았던 얼굴이다.
셋째, 이 화재는 공적 점검시스템이 어쨌든 작동하는 가운데 발생했다. 화재가 발생한 공장은 이미 작년 고용노동부에 의해 고위험 사업장으로 지정되었다. 소방관서도 올해 공장 한 동을 다수 인명피해 발생우려지역으로 지정했다. 회사는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안전관리 컨설팅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화재 예방을 위한 다중 점검시스템이 형식적으로는 갖춰져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점검 서류가 쌓이는 동안에도 화재의 위험은 감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움을 안긴다.
결국 실천이 없었다는 말이다. 시스템은 인간의 실천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란 중력의 법칙과 달리 구체적인 사람들에 의해 학습되고, 내면화되고, 실천되지 않는 한 실체가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자주 외면한다. 안전시스템은 사람들이 위험 요소들을 인지하고, 회피할 수 있고, 그런 행동들이 조장될 때 작동한다. 위험이 내재된 작업장에서 위험 요소들을 알리고, 위험 감수가 아니라 안전을 선택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책임은 바로 리더십에 있다.
유명 제빵 회사 공장에서 고추냉이 소스 혼합 작업을 하다가 청년 노동자가 사망한 사고에 대한 고용노동부 백서는 사고 원인을 네 가지로 짚었다. 안전장치에 해당하는 덮개가 덮이면 기계가 작동하고, 기계가 작동하면 덮개가 열리지 않도록 기능적 안전성을 확보하는 교차잠금 장치의 부재(‘고장’이 아니다), 자꾸 뭉치는 소스를 풀어주는 수작업을 위해 편의상 덮개를 열고 작업을 하는 오랜 관행, 안전조치를 수행하면서는 도저히 맞추기 어려운 규모의 작업량, 그리고 안전교육의 미비.
어떤 이들은 왜 안전 대신 편의를 택했냐며 희생된 노동자를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도 회사의 일원이라는 책임감에 어떻게든 작업량을 맞추기 위해 무리했던 노동자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 말이다. 숙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디에 위험이 있는지 채 알지 못했던 노동자의 취약성을 고려하지 않는 말이다. 위험하다는 감각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게으른 사람으로 여겨지는 조직 분위기를 감추는 말이다. 지금까지 누구나 그렇게 해 왔다는 관행의 압력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하는 일선 노동자의 처지를 외면하는 말이다.
안전을 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위험인지, 무엇이 안전한 길인지 정보가 있어야 하고, 현장의 급박함 가운데 안전을 택해도 된다는 심리적 안전감이 조직 내에 흐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참들이 처하는 물리적, 기술적, 사회적 불확실성이 조직 차원에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이제는 형식적인 시스템의 고도화뿐 아니라 사람의 처지에 주목해야 한다. 조직이 구성원에게 보내는 신호가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이것은 리더의 일이다.
우리 사회가 생존을 위해 효율과 이윤을 강조하긴 하지만, 정말로 마음속으로까지 그런 나라를 정당하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이 나라에서는 이윤보다 생명을 중시하는 문화와 제도가 갖추어져 있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그 어떤 국가들보다 낮은 산재율을 기록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통계로 보여주고 싶은 리더들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누구나 안전을 선택해도 안전한 나라가 좋은 나라이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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